서문

 

정착문명(특히 중원)의 역사가들이 남긴 기록 중 놀랄 만큼 방대한 분량이 전해지지만 유목민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은 매우 드물었다.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풍속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이들 부족들이 남긴 몇몇 비문과 문헌기록들은 초원의 생활과 가치관에 대해 독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머리말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났을 때 그 결과의 역사적 중요성은 종종 다르게 해석되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어떠한 공통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으며, 어느 정도까지 서로의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유목민과 한족들의 세계관 차이는 그들 관계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이상적인 지도자는 하늘로부터 행운과 카리스마를 부여받고 추종자들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영웅적 전사인 부족사회의 다이내믹한 모습은 궁궐에 갇혀 상소문을 읽고 복잡한 관료사회를 운영하면서 천하를 지배한 한족 황제의 개념과 완전히 달랐다.

     변경에 대한 기록은 중원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고유의 가치가 없는 주변 역사였기 때문에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부족민들을 중원에 복종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려 한 시도는 종종 변경 관계의 실제 모습을 숨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목민들 이“조공을 바치고”, “경의를 표하며” 혹은“인질을 보냈다”는 기록을 보지만, 실제 이 기록들은 유목민을 달래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보냈던 사실을 숨기려 한 외교적 연막(煙幕)에 불과하였다. 사료에 내재된 편견은 매우 명백하지만 민족 중심주의의 현대 학문은 이러한 편견을 비판 없이 지속시켰다. 예를 들면, 중원왕조의 역사연구에 인생을 바친 학자들은 중원문화의 전통기록에 몰입하여 종종 무의식적으로 한족 가치관과 세계관을 흡수하고 수용하였다. 그들은 한족문화권 내부에 대한 해석에 신중하고 비판적이었지만, 한족문명을 위협한‘야만인’들에 대해서는 한족의 시각에서 서술하였다. 그리하여 제국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전하러 초원에서 온 냄새나는 사신을 응접한 한족 조정 관료의 보고서에 공감했다.

 

 

내륙아시아 유목사회와 외부세계의 관계사는 이 책에서 계속 다루게 될 다섯 가지 기본 쟁점에 초점을 맞춘다.

 

1. 정치조직 : 유목민들은 어떠한 기반을 토대로 지역의 사회정치적 조직들을 통합한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였는가? 

2. 상호작용의 영역 : 내륙 아시아의 유목민들과 이웃 정착 문명(특 히 중원)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왜 유목민들은 어느 시기에는 강력하였지만 다른 시기에는 그렇지 못하였는가? 

3. 중원의 외래왕조 : 중국 전통왕조시대의 절반이 되는 시기 동안 북중국을 통치한 외래왕조를 세운 민족들이 대부분 만주에서 흥 기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변경관계의 순환주기가 있는가? 

4. 몽골의 세계정복 : 몽골제국은 초원 정치 발전의 최고점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그로부터의 탈선을 나타내는가? 

5. 유목사회의 발전 : 여러 시기의 유목사회 사이에 고대, 중세, 그 리고 현대의 분석적 구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가?

 

 

유목국가

 

     북아시아 유목민 사이에 국가 계급체제를 지탱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중원과 초원의 관계였다. 유목국가는 이곳저곳에 분산된 양치기 들의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중원의 경제를 강탈하여 유지한 것이며 이러한 강탈이 가능하도록 부족민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유목국가가 존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초원의 계급관계 발전을 가정할 필요가 없다. 나아가 유목국가는 전제적 통치자가 죽은 후에 곧바로 붕괴되어 버리는 개인적 창조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초원 국가는 외부관계에 의해 조직되었기에 정착국가와는 매우 달랐으며 각 각 다른 기능을 가진 부족과 국가 계급체제를 동시에 갖추었다.

     내륙아시아 유목국가는 ‘제국연맹(imperial confederacies)’으로 조직되어 대외관계에서는 전제정치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 부적으로는 협의(consultative)를 통한 연방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유목국가는 제국 군주와 조정, 제국의 부족을 감독하기 위해 임명된 관료, 그리고 토착 부족장들이라는 적어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통치 계급체제를 갖추었다.

     하부지역 층에서 부족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 었고 부족장의 권력은 중앙의 임명이 아닌 부족민의 지지에 기반하였 다. 그러므로 분열된 초원의 특징인 습격과 살해를 근절시킨 것을 제외 하면 지역 차원에서의 국가조직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제국을 구성한 부족들은 임명된 제국의 관료(일반적으로 황실의 일원)들을 통해 중앙 과 연결되었다. 제국 관료들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군사 징발을 조 직하며 부족장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제국 정부는 대외관계와 전쟁 을 독점하면서 제국 전체를 대표하여 다른 세력과 협상하였다.

     이 조직의 안정은 초원 외부에서 자원을 추출하여 국가의 자금을 공급하며 유지되었다. 제국 정부는 유목민들을 위해 습격을 통한 전리 품, 교역권, 그리고 원조물자 등을 획득하였다. 비록 지역의 부족장들은 자치권을 상실하였지만 그 대가로 제국체제로부터 물자적 이익을 얻었 으며 각 부족들은 이러한 물자적 이익을 직접 획득하기에는 세력을 충 분히 갖추지 못하였다. 지역 차원에서의 부족조직은 결코 사라지지 않 았지만 중앙집권의 시기에 그 역할은 내부 상황에 제한되었다. 체제가 붕괴되면서 지역의 부족장들은 독립하였고 초원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는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 밖에서 늑대처럼 배회하며 중원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정복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초원의 유 목민들은 중원 영토의 정복을 기피하였다. 중원과의 무역을 통한 이익과 물자 제공은 유목제국을 견고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자원을 파괴할 의도가 없었다. 예를 들면 위구르는 중원으로부터의 수익 에 의지하였기에 그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한 왕조를 유지하려고 중원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도 하였다. 몽골을 제외하면유목민의 정복’은 중원의 중앙권력이 붕괴되어 강탈의 대상이 되 는 국가가 사라졌을 경우에 일어났다.강력한 유목제국은 중원의 토착왕조와 나란히 흥기하고 붕괴되었다. 한나라와 흉노제국은 10년 이 내의 시기에 같이 출현하였고, 돌궐제국은 바로 수당왕조에 의해 중원 이 통일되었을 때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초원과 중원은 몇십 년의 기간내에 동시에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원이 심각한 혼란과 경제적 쇠퇴를 맞아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자 초원은 그 구성 부족들로 해체되었으며 북중국에 질서가 다시 복원될 때까지 통일을 이룰 수 없었다.

    외래왕조의 중원 정복은 요하지역에서 기원한 유목민 혹은 삼림 지역에 거주한 만주부족들의 위업이었다. 동일한 시기 중원과 몽골리 아 중앙집권 통치가 붕괴되면서 만주의 변경인들은 두 강력한 세력의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초원의 부족과는 달리 만주인들은 평등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지역 내의 정착지역과 밀접한 관 계를 맺고 있었다. 분열 시기에 이들은 하나의 통치체제 안에 한족과 부족의 전통을 결합한 작은 왕국들을 변경 주변에 세웠다. 이 안정된 고립지역에서 만주인들은 중원의 군벌 혹은 초원 부족장들이 세운 단 명의 왕조들이 서로를 파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주인들은 이 왕조들이 붕괴되면 먼저 북중국의 작은 부분을 정복하고 그 뒤를 이은 2 차 정복 파장 때 북중국 전체를 정복하려 하였다. 외래왕조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은 몽골리아 유목국가의 발생에 유리한 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외래왕조는 토착 한족왕조와 전혀 다른 변경정책 을 실시하였기에 유목국가는 좀처럼 나타날 수 없었다. 만주부족들은 정치적·군사적 분열정책을 채용하였고 유목민의 통일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벌였다. 칭기즈 칸의 몽골을 제외하고는 만주 외래 왕조가 중원을 통치했을 때 초원의 유목민들은 강력한 제국을 세우지 못하였다. 외래왕조가 중원 내부의 반란군에 대처하기 위해 공격적인 변경 방어를 포기한 후에서야 초원 유목민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 다. 한족 반란군이 외래왕조를 몰아내고 토착왕조를 세운 시기에 초원 에서도 통일이 이루어지고 이내 중원 강탈을 위한 군사행동을 준비하였다.

 

동시붕괴

 

     중원과 초원제국의 동시 붕괴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조장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왕조들은 수적으로 는 많았지만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고 불안정하여 짧은 시기에 멸망하였 는데, 특히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성장하는 군벌이나 부족장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그들은 다시 질서를 확립하고 광활한 영토를 성공적으로 통치한 한층 잘 조직된 왕조에 의해 대체되었다. 남쪽의 한족왕조와 동북, 그리고 서북의 외래왕조들은 중원의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리고 외래왕조를 멸망시키고 토착 한족이 중원을 지배하며 초원 역시 아무런 외부세력의 제약 없이 통일을 이루면서 순환의 첫 주기를 마치 게 된다. 주요 한족왕조의 붕괴에서 안정된 외래왕조의 통치에 의한 질서의 재확립까지 걸리는 시간은 순환주기가 거듭되면서 점점 짧아졌다. 한나라 멸망 후에는 몇 세기의 혼란기가 있었고, 당의 멸망 후에는 몇십 년의 혼란기가 있었지만 명의 멸망 후에는 불안정한 혼란기가 거의 없었다. 외래왕조의 존속 기간 역시 유사한 패턴을 보여 첫 순환주기가 가장 짧았고 세 번째 순환주기가 가장 길었다. 

     본질적으로 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몽골리아 초원부족들은 중원의 정복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변경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한족왕조가 내부 반란으로 붕괴되었을 때 만주지역은 그 정치와 생태 적인 조건으로 외래왕조가 흥기하는 온상이 되었다. 이 주장은 중원과 그 북방 이웃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기존의 여러 이론들과 매우 다르다. ‘중국사’의‘정복왕조’에 대해 큰 영향력을 미친 비트포겔의 연구는 흉노, 돌궐, 위구르와 같은 초원제국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그는 전형적 한족왕조와 대비되는 외래왕조를 유목민과 농경부족이라는 범주로 구분하였다. 정치조직이 아닌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비트포겔의 연구는 몽골 원을 제외한 모든 정복왕조가 만주에서 흥기하였다는 인상적인 사실을 덮어 버렸다. 또 몇 세기 동안 중원왕조와 나란히 성공적으로 변경을 통치하였던 초원제국을 세운 몽골리아의 유목민과 중원 내부에 왕조를 세웠지만 초원지역에는 강력한 제국을 세우지 못한 만주의 유목민을 구분하지 않았다.

    중원과 그 북쪽 부족민들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아마도 오웬 라티모어의 걸작 『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일 것 이다. 몽골리아, 만주, 그리고 투르키스탄에 대한 라티모어의 개인적 인 지식과 친밀감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부한 내용을 제공하며 50년이 지난 오늘(1989)에도 획기적인 성과로 남아 있다.

     비트포겔과 마찬가지로 라티모어 역시 절대 다수의 성공적 정복왕조가 바로 만주의 주변 지역에서 흥기 하였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못하였다. 나아가 칭기즈 칸을 그러한 주변 변경 지도자의 주요 사례로 삼으면서 라티모어는 자신이 제안한 광활 한 초원과 혼성문화의 변경사회와의 구분을 오히려 애매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칭기즈 칸은 이전 시기 몽골리아의 흉노나 돌궐 지도자만 큼 변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관상 지리적 모순은 북중국을 통치한 것이 한족왕조 혹은 외래왕조인가에 따라 변경의 정의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몽골리아 남부는 외래왕조 가 초원의 정치조직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을 실행하였을 때만‘혼성 변경지역(mixed frontier zone)’의 일부가 되었다.

 

 

변경관계의 기본전개

 

     180년은 중원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되지 않아 후한왕조는 이름만 존재하였고 인구와 경제는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유목민들이 아니라 한족 반란군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다음 1세기 반 동안 여러 군벌 들이 중원에서 싸우는 동안 만주지역 선비족의 후예들은 작은 국가들 을 세웠다. 이들 국가 중 모용부의 연나라가 가장 성장하여 4세기 중반 동북지역을 통치하였다. 연나라가 국가의 틀을 잡은 뒤 다른 선비부족 인 탁발 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북중국 통일 이후 몽골리아의 유목민들은 다시 유연부족의 통치 아래 중앙집권 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탁발 위가 변경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가능한 많은 수의 가축과 사람들을 포획하기 위해 몽골리아를 침략하였기 때문에 유연은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다. 탁발위의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북위왕조가 한화되어 이전 한나라와 비슷한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왕조 말기까지 유연은 중원을 위협하지 못하였다.

     내부 반란으로 북위가 붕괴되고 6세기 말 서위와 수나라에 의해 중원의 재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 유연제국은 그들에게 예속되었던 돌궐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돌궐을 두려워한 중원 군주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대량의 비단을 보내었다. 변경은 다시 양극화체제로 바뀌었고 돌궐은 흉노와 유사한 강탈정책을 실시하였다. 수나라의 멸망과 당나라의 흥기 시기에 돌궐은 중원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패권 쟁탈에 나선 한족 후보들을 지지하였다.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왕조는 내부 반란의 진압을 유목민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8세기 중엽의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 데 위구르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이는 아마도 당왕조의 수명을 1세기 더 연장하였을 것이다. 840년 위구르가 키르기즈의 공격에 무너진 후 초원의 중심지역은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당나라 역시 중원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붕괴되었다. 당나라의 붕괴는 만주지역에 혼성국가가 조성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유목민 거란족의 요왕조였다. 거란은 10세기 중엽 당나라의 뒤를 이은 단명의 몇몇 왕조들이 모두 붕괴 된 후 북중국지역을 손에 넣었다.

     감숙지역은 탕구트의 대하(大夏) 왕국이 되었고 그 외 중원지역은 토착 송왕조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몇 세기 이전의 모용연과 마찬가지로 거란은 한족과 부족조직을 통합하 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란도 다른 만주의 부족집단인 여진에 의해 정복되었다. 삼림지역의 여진 부족은 12세기 초 거란제국을 멸망시키고 금왕조를 세웠으며 북중국 전부를 정복하여 송나라는 남쪽에 제한되었다. 여기까지 두 차례의 순환주기는 그 구조가 놀랄 만큼 유사하지만 몽골의 흥기는 이 체제를 와해시키고 중원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기간 지속된 한족왕조가 붕괴된 후 여러 군벌들의 투쟁에 의해 북중국이 혼란에 빠진 시기에는 어느 유목국가도 몽골리아의 초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만주에서 기원한 외래왕조가 질서를 확립 하며 변경이 안정되었지만 동시에 유목민에게 하나의 목표물을 제시함 으로써 초원에서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을 촉진하였다. 이 외래왕조들 은 몽골리아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고 그곳 부족들 사이에 혼란을 조장 하기 위해 부족정치를 활용하였다. 외래왕조는 분할 지배의 전략을 사용하고, 대규모의 침략을 통해 많은 사람과 가축을 제거하였고 일부 부족과 왕실을 연결하는 혼인 전략으로 동맹체제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유연은 탁발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칭기즈 칸 이전 거란과 금나라 시기의 몽골리아는 결코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칭기즈 칸이 생애 말년에서야 여진제국의 간섭을 극복하고 이루었던 초원의 통일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가 초기에 직면하였던 문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 칭기즈 칸은 생애 대부분을 여진왕조의 반대를 극복하는 데 보냈으며 실패할 뻔한 상황 도 여러 번 있었다. 칭기즈 칸의 국가는 매우 독특하였다. 엄한 규율의 군대와 고도의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장들은 그들의 권력을 상실하였다. 과거 몽골리아에 통일국가를 세운 통치자들처럼 칭기즈 칸의 초기 목표는 중원의 정복이 아니라 위협을 통해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고도의 한화를 이루었던 여진 조정은 여전히 유화책을 거부하고 몽골과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간의 전쟁으로 북중국 대부분 지역이 폐허화되었고 몽골은 그 지역의 통치를 떠맡아야 하였다.

     몽골제국이 (강탈이 아닌) 통치 에 대한 관심과 준비가 없었다는 사실은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채택하고 정식 정부조직을 설립한 것 에서 잘 알 수 있다. 칭기즈 칸의 승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제시한 모델이 결정적 (deterministic)이 아니라 개연적(probabilistic)인 것임을 보여준다. 혼란기에는 칭기즈 칸과 같은 부족의 지도자가 언제나 존재하였지만 중원의 자원을 확보한 만주국가의 단호한 반대를 무릅쓰고 초원을 통일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서 유연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돌궐은 흉노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돌궐이 반드 시 더 큰 군사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침략을 막기 위해 풍부한 물자를 제공한 새 한족왕조를 착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칭기즈 칸은 온갖 곤란을 극복하고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여진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몽골리아는 3세기 이전 위구르의 붕괴 후에 통일된 적이 없었으며 몽골은 초원의 여러 부족 중에서도 약한 부족이 었다. 이 강력한 유목국가와 강한 외래왕조의 만남은 유일무이한 것이 었으며 매우 파괴적이었다. 몽골은 재물을 얻기 위한 평화협정을 위해 잔혹한 침략 전략을 사용하였으나 여진이 협상을 거부하였고 몽골이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결국에는 금나라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었다.

    몽골제국의 침략 기억이 아직 생생하였던 명나라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이전 사례를 무시하고 유목민들이 중원에서 명을 대체하려 한다고 두 려워하여 그들과의 교섭을 거부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러자 유목민들은 지속적으로 변경을 습격하였고 명나라는 다른 어느 한족왕조보다 많은 침략을 받았다. 명이 마침내 정책을 바꾸어 유목민의 요구를 수용하자 습격은 대부분 멈추었고 변경은 평화를 되찾았다. 17세기 중반 명이 한족 반란군에 의해 멸망되자 몽골이 아닌 만주족이 중원을 정 복하고 왕조를 세우게 된다. 과거의 만주 통치자들처럼 청나라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실행하고 몽골 지도자들을 포섭하였으며 몽골부족을 작은 규모로 나누어 초원의 정치적 통일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근대 무기와 운송체제, 그리고 새로운 국제관계가 한족중심적 동아시아 세계질서를 파괴하자 중원과 내륙아시아 사이 전통 관계의 순환주기도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1. 잘 읽고 갑니다 좋은 정보 잘 얻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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