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임진왜란에 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지만, 먼저 그것들을 종류별로 개괄한 후에 무사들이 작성한 기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쓰마[薩摩]의 시마즈씨[島津氏] 조슈[長州]의 모리씨[毛利氏]는 임진왜란의 주요 참전자였을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한국 침략을 주도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사들의 임진왜란 기록을 검토하는 데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임진왜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패배였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 일본이 임진왜란을 과연 패배로 인식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것과 관련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세 번째로는 임진왜란 전후에 조선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이 어떤 조선 인식을 바탕으로 일어났으며, 또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對)조선=한국 정책을 역사적으로 규정한 조선 인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기록

 

    유교문화권에 한 다리만 걸쳐 놓고 있던 일본에서는 역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동아시아 지역과 상이한 양상이 나타났다. 고대 일본에서는 『일본서기(日本書記)』를 위시해서 정사로 간주할 수 있는 서적이 몇 차례 편찬되었지만, 율령국가가 쇠퇴하면서 정사 편찬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10세기 이후에는 정사가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조선 전기의 『실록』을 복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후대에 남기는 것에 대한 조선의 이러한 열의와 비교해 보면, 일본의 상황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역사서 편찬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였다는 인식도 가질 수 없게 만든 큰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막부와 다이묘의 기록

 

관정가보

     우선 막부의 기록으로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이하 『寬政家譜』라고 약칭함)이다. 『관정가보(寬政家譜)』는 1799년에 막부의 명령에 따라 편찬이 시작되어 1812년에 완성된 총 1,520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가계기록이다.

 

     『관정가보』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도쿠가와 시대 중기에 존재하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가계이며, 가계가 단절된 가문은 그 지류가 존속되고 있는 가문에 한해서, 가계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는 범위 내에서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정부의 명으로 편 찬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족보와 구별되고, 류큐[琉球]의 가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류큐의 가보와 공통되는 점이지만, 중요한 개인에 관해서는 극히 상세한 이력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 개인기록 부분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술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의 도요토미 군대는 전체가 9개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 는데, 각 부대의 지휘자는 제1대부터 순서대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키타 히데이에,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였다. 그 밖의 중요한 참전자로서는 소 요시토모[宗義智],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등이 있으며, 또 수군의 중심적 인물로서는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을 들 수 있다. 이들 주요 참전자 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우키타 히데이에, 도요토미 히데카쓰 등 4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관정가보』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도쿠가와 시대의 임진왜란에 관한 공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구로다 나가마사, 소 요시토모, 시마즈 요시히로, 구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의 전기 부분에는 임진왜란 과 정유재란 때의 행적이 매우 상세하게 나와 있다.

 

     『관정가보』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의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의 특징 은 대부분이 승전 기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군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의 역 때, 총대장은 우키타 히데이에였고, 육군의 대장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었다. 수군의 대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및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 아키이었다. 4월 12일에 나고야[名護屋]를 출발하여 부산포에 도착, 거기서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어 몇 군데의 성을 공략해 격파하고, 얼 마 후 각 군이 서울로 쳐들어가 우키타가 진을 쳤다. (그런 도중에)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수만의 적진을 격파하고 1천여 개의 수급을 얻고 생포한 자가 200명에 이르렀다. …… 게이초[慶長] 2년, 다시 그곳을 정벌하고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바다를 건넜다. …… 唐島 앞에 있는 판옥선이 걸핏하면 우리 군선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방해했다. 우선 이것을 쫓아내려고 웅천에 가서 큰 배를 만들고, 각 군이 일체가 되어 종과 북의 신호에 맞춰 진격하거나 후퇴하며 적을 물리치기로 약속을 한 후, 앞뒤를 다투어 적선을 공격하여 순식간에 적선 수십 척을 빼앗았다. 나머지 배들도 모두 패배하고 바다 쪽을 향해 도망가는 것을 우리 군이 쫓아가 물리쳤다. 이러한 사정이 나고야에 알려지자 다이코 [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한을 보내왔고, 도쇼구[東照宮, 도쿠가와 이에야스]께서도 공적을 치하하는 서한을 보내셨다

『寬政家譜』, 937권, 藤原氏支流 脇坂條.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공적 만이 기술되어 있고, 이순신이 지휘하던 수군과 싸워서 패배한 이야기 등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불명예스런 기록으로서는 오토모 요시무네의 경우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분로쿠 2년 조선의 역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대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니시는 요시무네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에게 사람을 보내어 원군을 청했으나, 요시무네는 명나라 군대의 형세에 눌려, 가서 구원하지 않았다. 다이코는 이를 전해 듣고 매우 화를 내면서, 요시무네의 행동은 일본의 치욕이라며 영지를 빼앗아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에게 주었다.

『寬政家譜』, 114권, 淸和源氏 大友條.

     

 

      『관정가보』 속에서 드물게 불명예스런 기록이 남아 있는 데, 이는 오토모가 이 처벌을 계기로 몰락하여, 도쿠가와 정권 아래서 존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생각된다. 바꿔 말하면 도쿠가와 시대에 다이묘로서 존속한 가문의 경우,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의 패배나 불명예스런 기록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1. BlogIcon 달려라촌딱 2020.10.21 15: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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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좋은 역사 잘 배워갑니다

  3. BlogIcon notom 2020.10.23 08:35 신고

    일일 조회수 3000을 어떻게 달성하셔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ㅎㅎ 구독하고갑니다! 소통하며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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