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거기 산이 있으니까.” 

- 조지 말로리

 

 

 

 

어떤 오타쿠들은 좀 미쳤습니다.

 

이 인간들은 이상한 구실을 붙여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입니다.

 

 

구실이야 제각기 다양합니다.

 

 

 

인류 이성과 과학의 진보를 위해서,

“우리는 신사처럼 죽으리라.”  남극점에서 돌아오던 중 혹한과 기아로 인해 사망.

 

 

 

 

 

 

쉽지 않고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 댈러스 유세 중 피살.

 

We choose to go to the Moon...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쉬워서가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Many years ago the great British explorer George Mallory, who was to die on Mount Everest, was asked why did he want to climb it. He said, "Because it is there.

오래전, 위대한 영국 탐험가 조지 말로리가 에베레스트 산에서 숨졌습니다. 그는 생전에 왜 거기 오르냐는 질문을 받았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거기 있으니까."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음, 우주도 저기 있네요. 그리고 우리도 올라갈 겁니다. 

 

 

 

 

 

대원들을 무사히 구하기 위해서, 

 

 

"전원 무사합니다!"  과로로  심장이 멎어 사망.

 

 

 

자기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2016년 남극 무지원 단독횡단 중 사망.

 

 

오늘은 미지에의 동경을 그린, 메이드 인 어비스를 보고 느낀점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배경

 

 

 

주인공이 사는 오스라는 마을은, 중앙에 깊숙히 뚫려있는 ‘어비스(심연, 궁창)’라는 것을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입니다. 

 

 

 

이 오스는 멀리 있는 초강대국 베오르스카의 관리를 받는 전형적인 ‘식민개척 마을’인데요, 

 

 

 

이 중앙에 있는 어비스라는 것은 

 

 

작중 과학기술로도 아직 기원이나 원리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일종의 초이성적이면서도 초과학적인 미지의 세계입니다. 

 

 

 

깊게 들어갈 수록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이 곳은 그 어떤 비이성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는 환상과 광기의 공간입니다.

 

 오스 섬의 과학기술은 현실세계의 19세기 말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은 급격한 산업화,

 

 

그리고 낭만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서구 근대산업문명은, 과학적 원리와 화석연료에 기반해 웅장하게 돌아가는 기계를 앞세워, 미지의 자연을 낱낱이 해체,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어보였고, 모든 것이 앞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빠르게 진보하고 있었습니다.

 

 

 

통신 혁명이 세계를 이었고, 탐험가들은 미개척지에 줄을 그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인간이 내뿜은 검은 연기로 뒤덮였고, 예술가들은 동족의 강력함에 압도됐습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낭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동시에 살해돼버린 고향의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인간은 막강하지만 개인은 나약했고, 모험 가득했던 뒷산 시골의 풍경은 더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시선이 어디에 닿든, 그곳에 인간이 바글댔습니다.

 

 

예술가들은 작금의 현실에 개탄했습니다.

 

 

이윽고 워싱턴 어빙은 이렇게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그 속에 들어가야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자연을 새롭게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낭만적 자연주의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그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화폭에서 찾으려 했던 반면, 모험가들은 그 미지의 자연을 직접 온몸으로 부딪히려 했습니다. 19세기의 인류에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바로 남극입니다. 

 

 

당대의 위대한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는 남극을 ‘근대성이 멈추는 지점’으로 묘사했고, 러브크래프트에게 있어 남극은 기이한 괴생물체와 고대 도시가 잠들어 있는 몽환적이고 공포스러운 장소였습니다. 

 

 

남극은 아무것도 없는 동시에, 상상속의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그 어떤 인간도 겨울 평균기온 영하 70도, 평균풍속 50m/s(태풍 ‘매미’수준)의 공간을 이겨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마다 인간성의 끝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남극을 새로운 목적지로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대륙이동설과 진화론, 그리고 인류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모험가들은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주제의식

 

 

저는 누구나 미지에 대한 동경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가지 이유로 동경을 묻어놓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동경을 추구하기 위해선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때론 가족들을 부양해야하기때문에, 때론 내일의 희망 따위보다 오늘의 맛있는 밥 한끼가 간절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경을 묻어둡니다. 우리는 인간인 이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인 이상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가 동경하는 것을 포기하고, 편안하고도 존경받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낱 동경 따위에 목숨을, 아니 어쩌면 목숨보다 소중한, 인간으로서의 다른 모든 가치를 걸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는 그런 미친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자취가, 때론 우리 모두의 그 일상적인 풍경을 뒤바꾸어놓았습니다. 

 

 

 

저는 동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곧 좋은 인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옛날부터 산을 타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가고 싫었습니다. 

 

산이 뭐가 그리 좋다고 처자식 내버려두고 개죽음이나 당하는가, 남겨진 가족들은 뭐가 되는가. “산이 거기 있으니까?” 그럼 “가족은 저기없냐?”는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모험을 추구하는 본성,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본성이 있을지도요.

 

 

그 본성을 억누르고 안락한 삶을 살아갈지, 본성을 따라 목숨을 걸지는 자유의지에 따른 개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몇번이고 목숨을 건져도 기어코 다시 산으로 바다로 향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짓을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죽게될거란 걸 알면서도 갑니다.

 

 

그러다가 운이 다하는 순간 세상을 영원히 등집니다. 

 

 

메이드 인 어비스는, 광기어린 동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의 한 측면을,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잃어버린 유년기의 아르카디아를 찾아 숲으로 들어갔듯, 

 

 

리코 또한 잃어버린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찾기 위해 어비스로 내려갑니다. 

 

 

조지 말로리가 산에서 죽을 운명을 타고났듯, 

 

 

리코는 동경하는 어비스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이 만화가 잔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성취감은 고통과 강하게 결부돼있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그 동경은 고통을 머금고 강해집니다. 

 

 

 

 

 

동경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실험체로 삼아 한계 너머까지, 즉 나락의 끝까지 가려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시험을 통과하는 데 성공해, 결국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납니다. 

 

 

남겨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취보다도, 

 

 

그리고 설령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불가능할지라도,

 

 

기어이 미지에의 동경을 선택해고만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그저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있음에 안심할 수도,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들의 용기와 인내에 박수를 쳐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화는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안락한 삶을 내팽개쳐두고 미지의 동경만을 추구하는 인간은,

 

 

보통 세상, 그리고 기지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광인’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메이드 인 어비스 내에서도 ‘사람이라면’ 절대 옹호할 수 없을 것만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만의 동경을 추구하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존경합니다.

 

 

그들의 만행을 불쾌해하는 동시에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그들에게 경외심을 느낍니다.

 

 

 

그 불편함은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 속 동경을 파묻어버리고 합리화하기위한 방어기제이며, 

 

 

 

경외심은 곧 마음 속 깊이 묻어놓은 자신만의 동경을 저도 모르게 마주하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메이드 인 어비스를 통해 우리가 직접 심연이나 나락에 가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직접 자신만의 동경을 마주하는 무시무시한 모험을 하지 않고서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동경을, 

 

 

모험에 미친 광인들의 시각으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텅 빈 공간으로 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단지 모험을 사랑해서,
어떤 이들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 때문에.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작은 목소리들의 유혹, 즉 미지의 것이 지닌 신비스러운 매력에 현혹돼,

잘 다져진 길에서 벗어난다.

 


어니스트 섀클턴, 남극의 심장 中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