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국물이 흐르는 파리한 몰골의 아이가 나무를 팬다. 거의 자신의 체구만한 장작을 쥔 한쪽 손의 가락이 다해서 여섯이었다. 아이의 어미는 농민의 딸로 알려졌지만 실은 대장장이의 딸이었다. 그녀는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아이를 먹여살렸다. 딸아이를 먼저 낳았고, 그 때문에 아이를 또 낳아야만 했다.
대장장이의 딸, 나카(仲)
"네 놈이 태어난 날은 해가 너무나도 좋았어. 그래서 네 이름이히요시마루(日吉丸)인거야."
아이는 이야기를 한귀로 흘렸다. 아이의 어미는 히요시마루의 아비에 대해서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 히요시마루는 그 때문에 실은 자기가실은 태양의 아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히요시마루는 늘상 집 구석에 틀어박혀있던 어느 사내를 기억한다.
그는 오와리(尾張) 아이치군(愛知郡) 나카무라고(中村郷)의 어느 잡졸,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이었다. 체구는 작지만 요령좋고 날렵했던 칼잡이 기노시타는 전국의 싸움터를 전전하다 마침내 다리를 절게 되었고, 자신의 마지막 실수를 끊임없이 되새기다 세상을 떴다. 여섯 살의 기노시타 히요시마루는 새로운 아버지, 지쿠아미(竹阿弥)를 맞게 되었다. 애딸린 여자 혼자 살아가기에는 힘든 시대였기에.
오와리에 터를 잡은 오다(織田) 가문에 봉임하는 하급무사, 지쿠아미(竹阿弥)는 히요시마루를 무자비하게 학대했다. 그는 이미 슬하에 자식 둘을 데리고 있었고, 남의 자식에게 잘해줄 마음 따윈 없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시대의 모범적인 사내였다. 그는 주군에게 늘상 개처럼 충성을 다했지만, 자식들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히요시마루는 출가해서 절에 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도 탈출했다. 그의 지옥같은 유년기에 드리운 그림자는 평생에 걸쳐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덴분 21년(1552년), 15세
열 다섯의 히요시마루는 기노시타 야에몬의 유산 일부를 물려받았다. 비루한 잡졸이었으나 장사밑천은 되었다. 기노시타 히요시마루는 바늘을 샀고, 바늘 장수가 되어 천하를 유람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구석구석 보았다. 그리고 어느 등나무 밑에서 이름을 새롭게 고쳤다. 히요시마루는 그렇게,도키치로(藤吉郎; 등나무사내)가 되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뛰어난 수완으로 이마가와 가문의 영역인 도토미(遠江)에서 이름을 떨쳤고, 그곳 히키마성(引馬城, 하마마쓰성浜松城)의 지성(支城)을 다스리는 성주마쓰시타 유키쓰나(松下之綱)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의 직신(直臣)으로 있는 이이오(飯尾) 가문을 모시는 자였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 같고, 원숭이라기보다는 사람 같군. 신기한 아이다."
도키치로는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 앞에서밤을 받아먹는 재롱을 부렸고, 곧 유키쓰나는 이 소년의 진가를 알아보게 되었다. 헤실거리는 만면 뒤에 영특함이 엿보였다. 유키쓰나는 소년을 채용했다. 도키치로는 곧장 그의 수완을 발휘했다. 여타 하인들과 다르게 그는 심부름을 받으면 늘상심부름값을 남겨오거나 심부름값을 상회하는 훌륭한 품질의 물건을 얻어왔다.그는 장사 수완을 발휘해 어떻게든 주군에게 더 좋은 물건을 넘기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었으며, 언제나 흥정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주군에게 이 사실을 티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그리고뛰어난 수완에 대비되는 천한 신분이, 도키치로의 발목을 잡았다.도키치로는 단연, 유키쓰나의 수하들 사이에서 특출남으로는 군계일학이었고, 그것이 곧장 시기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키쓰나의 수하들, 특히 고귀하고도 용맹한 사무라이들은 도저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잔꾀깨나 부린다는 이유로 천하디 천한 시장바닥 촌뜨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을 비롯하여 가문 누대로 용서할 수 없는 모욕적 처사였다. 그들의 수완이 광대 원숭이보다도 못해보이는 상황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도키치로는 어마어마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주군을 곤란에 처하게 한 도키치로에게, 유키쓰나는 격려의 봉급을 쥐어 내보냈다. 당시로서는 너그러운 처사였다. 배경따윈 없는 천출, 그저 쫓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키쓰나는, 원숭이에게 돈을 쥐어 보내주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을 했을지도 모른다. 비범한 원숭이를 보고, 유키쓰나 또한 작지만, 나름의 비범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소한 선택은 훗날 유키쓰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하직하는 도키치로는 눈물을 훔치며 주인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고는, 퇴청했다.
"원숭아, 나는 네게 너를 팔겠다. 더 좋은 상품으로 바꾸어 올 수 있겠느냐?"
"네이, 성주님. 이 기노시타 도키치로. 영주님께 훗날다이묘의 직위를 선물해드리겠나이다."
덴분 23년(1554년), 17세: 오다의 대머리쥐(禿げ鼠)
오와리
이렇게, 나름의 여윳돈을 마련한 도키치로는 고향인오와리(尾張)로 돌아왔다. 당시 오와리는 오랜 전란 끝에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본래 막부에 의해 임명된 정당한 오와리의 지배자는시바(斯波)가문이었으나,때는 하극상의 시대.
불안정한 가독 승계를 여러번 거쳐 어느새 시바 가문은오다 야마토노카미 (織田大和守) 가문의 괴뢰가 되었다. 다시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방계, 기요스삼봉행 중에서도말석에 속했던오다 단조노추(織田弾正忠) 가문의 괴뢰가 되었던 바, 오다 단조노추의 가주(家主)노부히데가 오와리 전역에 무명을 떨치다 급작스럽게 사망해 그의 어린 자식오다 노부나가가 가독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패악질을 부리고(시신에 향을 뿌리고 불질러 태워버렸다), 부하의 말을 탐내 사이가 틀어지매,가르치던 스승이 분을 참지 못하고 할복하는 등,인격적으로 잔학무도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였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바깥으로는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과 상쟁, 안으로는 집안 누대로 권력을 쌓은 중신들, 그리고 후계자 자리를 두고 도전하는 친동생 등과 투쟁하다, 마침내는경쟁자들을 모조리 꺾고 오와리 일국을 평정했다.
기요스성
이제 겨우 스무살의오다 '카즈사노스케(上総介)' 노부나가는 주군가문이었던 오다 야마토노카미, 이른바기요스오다가문을 멸문시켜버리고 그들의 본거지인기요스성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는 새로이 막부에 의해오와리 슈고직에 임명되었고, 명실상부 오와리 일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 기요스 성문 앞에, 열일곱살의 도키치로 또한 도착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기요스 성의 잡일을 담당하는청지기(小者)가 되었다. 이때의 그를 두고 훗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변소지기' 운운했으며,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했다는 일화 또한 남아있을 정도로 하찮아 보이는 일이었지만, 나름 고도의 관리능력을 요하는 지적인 일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도키치로는지능을 필요하는 일에는 제격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스무 살의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부터 여타 하인들보다 심부름을 훌륭하게 해내는 도키치로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는 도키치로를 두고,'하게네스미(禿鼠)', 즉 대머리쥐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라 훔치기(国盗り)'로 유명한 효융, 사이토 도산
한편, 이 해에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인미노 슈고다이(美濃守護代)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돌연 은거, 가독을 적자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에게 물려주는 일이 벌어졌다.
혹자는 이 사건이 실은사이토 요시타쓰가 중신들과 도모하여 일으킨 쿠데타였다고도 말한다.
도산의 아들,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
평소에 요시타쓰를모자란 놈취급하며 업신여겼던 사이토 도산은 그 못난 자식과 창 끝을 겨누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에 돌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형만한 아우 없다던가. 이듬해친동생들을 죽인 요시타쓰는 그 다음해에는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 사이토 도산마저 나가라가와 전투(長良川の戦い)(1556年)에서 살해해버리고 미노의 지배자가 되었다.
도산은 죽기 전에야, 제 아들 요시타쓰가 늠름하게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아들을 인정했다고 한다.
도산의 코와 목은 각각 베였고, 풀밭에 떨어진 목은 훗날 그를 참한 사무라이가 수습해 불당에 안치시켰다고 한다. 아비를 죽인 요시타쓰의 맹렬한 기세에, 뒤늦게 장인을 구원하러 온 오다 노부나가는 당해내지 못하고 오와리로 퇴각했다. 이때 오다 노부나가는 직접 후퇴하는 군대의 후위(신가리殿: 가장 위험하며 죽을 위험이 크다.)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1565년, 28세,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 (木下藤吉郎秀吉)
우누마성(鵜沼城)의 성주 오사와 지로자에몬(大沢次郎左衛門)도 도키치로의 설득에 감화되었다. 그는 사이토 가문의 중신으로서, 오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사이토 도산의 사위였다고도 한다.
아시카가 요시테루
한편 같은 해의 봄,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상경해있던 미요시 가문에 의해(미요시삼인중(三好三人衆): 미요시 나가야스三好長逸·미요시 소이三好宗渭·이와나리 도모미치岩成友通)갑작스레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검호쇼군으로 불릴만큼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던 그는, 다다미에 수없이 많은 칼을 꽂아두고 최후까지 분전했다고, 일설은 전한다. (에이로쿠의 변(永禄の變))
五月雨は 露か涙か 不如帰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
오월우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여 내 이름을 구름 위에 놓아다오.
이미 쇼군의 권위가 실추된 전국의 난세였다고는 하나, 분명 충격적인 일이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이후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며 여러 유력한 다이묘들의식객 노릇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쇼군가의 도련님이 떠돌이가 되었으니, 천하는 이때에 이르러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었다.
# 1566년, 29세, 스노마타 일야성(墨俣一夜城)
회유공작의 연이은 성공에 더불어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전설에 남은 공로를 세운다. 이른바스노마타 하룻밤의 성(墨俣一夜城) 전설이다.
스노마타 요새가 있던기소 강가 연변은 당대의 격전지였다.히데요시는 기소산에서 벌채한 원목을 기소강에 떠내려보내 이미 설득했던 마쓰쿠라성(松倉城) 의 성주인 쓰보우치 도시사다(坪内利定) 가 있는 마쓰쿠라로 옮기고, 또 그곳에서 가공한 목재를 다시 강에 떠내려보내 스노마타(墨俣)에 하룻밤만에 성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스노마타 하룻 밤의 성'이다. 이 이야기는 에도시대의 과장, 또는 완전한 허위의 전설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 어떤 전설도 아무 이유없이 생겨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미노에서의 전쟁을 거쳐 히데요시는 어느새, 오다 가문의 유력한 부장이 되어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1567년, 30세, 사무라이 대장이 되다
하치스카 마사카쓰
미노에서 히데요시는 지역의 유력 호족세력을 본인의 수하로 편입시켰다. 기소 강가에서 노략질을 일삼으며 세력을 떨치던 해적집단(수운업에 종사하는토착용병세력이었다고도 함) 하치스카당(黨)의 두령,하치스카 '코로쿠(小六)' 마사카쓰(蜂須賀正勝), 스노마타 성을 축조할 때 협력했던마에노 '쇼우에몬(小右衛門)' 나가야스등이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마침내 사이토 가문의 거성 이나바산성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함락되어 사이토 씨가 멸망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가 마키무라 도시사다(牧村利貞), 마루모 가네토시(丸毛兼利) 등을 수하(요리키, 与力)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오다 가문의 승승장구와 함께 히데요시의 출세길이 열렸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거점을 새로이 함락시킨 이나바산성으로 옮기고, 성의 이름을 기후(岐阜)로 고치고는 인장에천하포무(天下布武)를 새겼다. 오기마치 천황은 오다 노부나가를'고금에 유래없는 명장'이라 추켜세우며 황실 직할지를 회복시키고 돈을 빌려달라는 명을 내렸고, (당연히 무시당했다) 살해된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이곳, 미노에까지 흘러들어왔다.천하가 오다 노부나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그 중심에, 기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도 있었다.
아자이 나가마사
오다 노부나가는 북오미 (北近江) 지역의아자이(浅井), 가이(甲斐)의다케다(武田)가문과 각각 동맹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켰다. 특히아자이 나가마사와는 (浅井長政), 혼척관계가 되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수도 상락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 1568년, 31세, 미즈쿠리성을 함락시키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1만이 넘는 군세를 일으켜 거병, 남오미(南近江)지역으로 진군했다.(신장공기에 따르면,이때 오다군은 6만이 넘었다고 하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실제로는 1만 수천 정도 였을 것이다. 물론, 이또한 마찬가지로 대군임은 틀림없다)
그곳에는간논지성(観音寺城)을 거점으로 하는오미 롯카쿠(近江六角家) 가문세력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는데, 그들은 쇼군을 죽이고 교토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미요시 가문과 결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만이 넘는 군대를 먹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오히려 이들 세력을 병량 보급의 기회로 보았다.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이때 2천명의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이 되었고,미즈쿠리성(箕作城)을 야습하여 깨트리는 군공을 세워 무명을 떨쳤다.
미즈쿠리성(箕作城), 간논지성(観音寺城)이 차례로 함락되며 오미 롯카쿠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미요시 가문이 수도에 뻗치는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노부나가는 마침내 수도 교토에 입성할 수 있었다.군사를 일으킨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수도 상락 과정에서의 공로를 널리 인정받아 여타명문가 출신의 무사들과 함께 교토의 내정을 담당했다.
대머리쥐 토키치로는 더이상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
오다 노부나가를 등에 업은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는 쇼군(将軍)에 즉위하고는 야마시로국을 자신의 직할지로 삼았다. 노부나가는 그렇게오다-아시카가 연립정권을 수립한 뒤, 자신의 영지로 철군했다.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
오다 군이 교토에서 물러난 틈을 탄 미요시 세력과 결탁한 사이토 타츠오키가 쇼군이 기거하는 혼코쿠지(本圀寺)에 쳐들어왔으나 교토 방비를 위해 근처에 주둔 중이었던 친(親) 오다-아자이 세력, 특히아케치 미츠히데등의 분전 덕에 패퇴시킬 수 있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목숨을 구한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임시 어소인 혼코쿠지가 방어에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니조성을 쌓는 등, 연합 정권은 이때까지만 해도 공고해보였다. 그러나 실권을 쥐길 원하는 쇼군과, 그를 꼭두각시쯤으로 생각하는 센고쿠다이묘의 동상이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쇼군은 허수아비 신세를 한탄하며 각지의 다이묘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기 시작했고, 오다 노부나가 또한 쇼군의 어명을 빌어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교토로 상락해서 사실상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할 것을 종용했다.
# 1569년, 32세, 열흘동안 열 여덟개의 성을 함락시키다.
오기마치 천황 (正親町天皇)
이해 봄, 오기마치 천황은"노부나가를 부쇼군직에 임명하고 싶노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노부나가는 천황을 무시했다.
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
한편, 이 해에 남쪽 규슈 지역의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다지마슈고(但馬守護)야마나(山名) 가문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승낙, 다지마 방면으로의 출진을 명하였으며 그총대장으로서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를 임명했다. 일설에 따르면,자그마치 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고도 한다.
히데요시는 이 전쟁에서"열흘 동안 열 여덟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수도의 서북방 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이 전쟁에서 일군을 지휘할 역량이 있음을 입증해보였던 것이다.
# 1570년, 33세, 가네가사키의 전설
아사쿠라 요시카게 朝倉義景
오다 노부나가의 다음 목표는 에치젠(越前)의 다이묘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였다.
에치젠은 새로운 거점인 수도 지역과 원래의 본거지 미노 지역을 동시에 침략할 수 있는 거슬리는 지역이었다. 더욱이 아사쿠라 요시카게는상경해서 배알하라는 쇼군의 어명(사실상 노부나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시카가-오다 연립정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아사쿠라 가문은 아자이 가문과 전통적 동맹 세력이었기에, 그들을 치는 것은 자칫하면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아자이 가문의 지지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1570년 봄,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조정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선포하며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아사쿠라 가문의 성들이 하나 둘 함락되었고, 오다 측의 낙승이 점쳐지는 분위기였으나, 급보가 날아들었다. 아자이 나가마사가 아사쿠라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던 것이다.그는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혼인한 매제이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 아자이 가문이 배신하였다는 급보를 전해듣고는,"헛소리!"라고 일축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信長公記』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은 자그마치 2만이 넘는 군세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양쪽에서 오다 군을 협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오다 군은 퇴각은 기정사실이었으며, 당장퇴각 과정에서 오다 노부나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나 걱정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리고이 중대한 퇴각전에서 최후미 부대의 총대장*, 즉 신가리(殿)의 역할을 맡게된 것이 바로 기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이때, '죽을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신장공기『信長公記』나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 따르면 총대장은 히데요시였으나, 히데요시 이외에 아케치 미츠히데, 이케다 카츠마사와 같이 더 높은 지위의 무사가 퇴각전에 참전했기에 히데요시가 총대장은 아니었을 것이란 일설또한 있다. (『武家雲箋』) 그러나 어찌되었든 최후미에서 적을 맞았던 것만은 교차검증된다.
이 싸움이 바로, 훗날'가네가사키의 무너짐(金ヶ崎崩れ)', 혹은'가네가사키의 퇴로(金ヶ崎の退き口)'로 불리는 퇴각전이다.
이 때 그는 겨우 십 수명의 호위 병력만을 거느린 채, 기적적으로 교토로 생환하는 데 성공한다. (4월 30일)
오다 가의 제장들은 히데요시의 귀환에 마치귀신이라도 살아돌아온 걸 보는 듯이 했으며, 오다 노부나가는 그에게 직접 황금을 하사했다고 한다.오다 군은 이렇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