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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으로 청와대가 계속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에 한번 역사를 알아보려고 쓰는 글.



 

고려

신무문


청와대 터의 역사는 고려시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감.

 

당시 남경 별궁은 지금의 경복궁 북쪽에 지어졌었는데, 이곳이 훗날 조선시대 때는 신무문 북쪽의 경무대 자리, 곧 현재의 청와대 터가 됨.

 

 

조선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천하에서 가장 복스러운 땅


- 1990년대 발견된 표석 (300~400년 전의 것으로 추정)

 

 



조선시대, 이곳엔 삽혈과 회맹의식이 시행되던 회맹단이 존재하고 있었음.  삽혈이란, 희생물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나눠마시는 (혹은 바르는) 맹세의 의식이었는데, 조선시대때는 주로 공신회맹을 할때 이루어졌음. 옛 청와대 터에서 왕과 공신들은 엄숙하게 꿇어앉은 채로 소, 닭, 돼지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는 서로의 결속을 다지곤 했던 것임.

이때의 맹세는 지키지 않는 경우 귀신이 벌할 것이라는 협박도 들어가 있었음. 이때의 청와대 터에서는 소름끼치는 피의 주술이 행해졌던 것임,,,

 

(-> 이게 나중에 풍수지리상 청와대 자리가 안좋다는 근거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함. 너무 피를 많이 흘린 장소라는 거지. 근데 다르게 보면 터가 좋으니까 여기서 맹세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청와대 자리가 길지다 흉지다 하는 얘기가 이곳 저곳에서 나오게 되고 또 나중에는 구 본관 자리는 흉지인데 각도를 약간 틀어서 옆 쪽에 건물 지으면 그건 또 길지다 이런 소리도 나오고 암튼 난 풍수지리는 잘 몰라서 먼 소린지 모름..)



이때 당시 회맹단이 자리하고 있던 곳은 별다른 궁궐 건물도 없고, 신성시되는 탓에 민가도 없어, 모리배들이 활터로 삼을 정도로 탁 트여있는 곳이었음. 

 


경복궁(景福宮)의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전하께서 앉으셨던 단(壇)이 있는데, 그전부터 무사(武士)가 모여 활 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한 재신(宰臣)이 어제 떼 지어 모여서 마구 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금지시키니, 그 중의 두 무사(武士)가 팔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하여, 거의 구타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28년 10월 27일 

 

 

 

 

경무대

융문당
융무당

그러다가 1860년대,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이 중건되자, 회맹단이 있던 곳엔 융문당과 융무당이라는 전각들이 지어졌고, 이곳은 경무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음.

 

당시 경복궁의 북쪽 일대는 과거시험이나 군대 사열과 같은 목적을 위해 쓰이곤 하였는데 경무대가 바로 그 중심이었음. 또한 일종의 파티장으로서, 왕실 종친들을 위한 친목행사의 장소로 쓰이기도 하였고,  고종은 갑오개혁 이전까지도 계속 융무당에서 군영의 군사조련을 친람하곤 하였음.

 

그러나 이후 국력이 쇠함에 따라 경무대는 한동안 역사의 중심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음.

협력일치 / 세계의 우(승)자

 


일제강점기

 


경무대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나오는 것은 1937년, 일제강점기 시대였음.

1937 루산성명
1937 상하이

 

이곳이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의 관저 부지로 선정되었기 때문임.

미나미 지로 (1874年 ~ 1955年)

 

 

이미 이곳에 있던 전각들은 헐린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야산(高野山)의 용광사(龍光寺) 일부가 된지 오래였음.

용광사

 

 

1939년 완공된 총독 관저는 증산계통의 종교인 보천교의 본당에서 화려한 푸른 기와를 가져와 지붕을 만들었다고 함. 청와대가 푸른 이유는 바로 이때에 기원하는 것.

 

구 청와대 본관 (옛 총독 관저)




해방

 

 

 


“앗! 저기 온다. /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 / 저 어른이 누구신가요? 쉬- / 경무대서 똥을 치(우)는 분이요.”
  
— 고바우 영감,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세 명의 총독들이 이곳을 거쳐간 후,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들어섰음.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곳 경무대 총독 관저를 자신의 관저로 그대로 쓰게 됨. 

존 리드 하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또한 이곳 경무대를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 겸 생활공간으로 쓰게 되고, 이후 경무대는 곧 무시무시한 독재권력을 상징하는 단어가 됨.

 

일찌기없던공포 분위기 / 삼인조투표감행?

 

이대통령사선확정 / 부통령엔이기붕씨



1948년 경무대 폭파음모사건, 그리고 6.25전쟁때 내부가 완전히 쑥밭이 된 사건을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경무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경무대에서는 똥 푸는 사람도 귀하신 몸”이라는 풍자가 나올 정도로 위세를 떨쳤음.

그리고 1960년, 경찰은 경무대 앞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게됨.

이박사부처돌연하와이로망명 / 오늘아침김포공항을출발

 




청와대




4.19 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였음. 이때 새롭게 제시된 이름은 화령대청와대였음.

 

조선 건국 때의 예에서처럼, (당시에도 새로운 국호로 조선과 화령이 제시되었던 바 있습니다.) 경무대는 지금의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됨.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에, 황제의 격에 맞게 청와대를 황와대로 바꾸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 청와대는 현재까지 계속 같은 이름을 유지하게 됨.

 



민주화 이후

 


“천하제일복지 좋아하네.”

- 16대 대통령 노무현, 천하제일복지 표석의 문구를 비꼬며.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원래도 많았지만, 특히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된 이후부터는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음. 나는 풍수지리는 모르지만, 확실히 청와대 주인들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았기에 그런 말이 나올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음...

 

(역대 대통령중에서 하야, 수감, 피살, 자살을 피한 대통령은 딱 김대중 김영삼 둘뿐인데, 그들마저도 퇴임 이후 자식들이 구속되는 수난을 겪음)

 

 

 

결국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대대적인 신축공사와 리모델링이 단행되어 집무실(구 본관)과 관저가 나뉘는 등 오늘날의 청와대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앞서 인용했던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석은 바로 이때 발견되었던 것.)

 

 

1993년 김영삼 대통령때는 구 본관이었던 일제시대의 총독 관사가 허물어졌음.

 

 

 

 

 

 

 

청와대 개방되면 빨리 놀러가보고 싶다~~~

 

 

 

엄청 큰 새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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