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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백년동안 사람들이 나에 대해 계속,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그는 괴상하고 두려우며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샤를 모리스 드페리고르. 그는 곤디처럼 성직자였으며, 마키아벨처럼 귀족이었고, 푸셰처럼 타락했으며, 볼테르처럼 재치있었고, 악마처럼 절뚝거렸다."

 

- 빅토르 위고.

 

 

 

 

풀네임은 샤를 모리스 드탈레랑페리고르.

 

 

메테르니히, 캐슬레이 자작과 함께 100년 동안 이룩될 유럽의 위대한 평화를 설계한 사람.

 

 

지금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줄타기 인생을 알아보자.

 

 

 

 

 

1. 다소 슬픈 어린시절

그의 신발

 

탈레랑은 1754년, 파리의 귀족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린시절은 다소 뒤틀려있었다.

 

 

그는 다리에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의 장애를 두고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절름발이 악마(diable boiteux)'로 부르게 된다.

 

 

그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한 가난한 집에 맡겨졌을 때의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의 장애는 선천적이었다고 한다. 

(마르팡 증후군이라는 말도 있다고 함.)

 

 

당시 사람들은 레위기의 영향을 받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레위기 21:16~21

 

 

 

 

신체적인 흠결, 특히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윤색했을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와 더불어 지주의 장남에게만 지워진 독박 군복무의 멍에로 인해,

 

 

그는 일찌감치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성직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고, 10대 시절의 그는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분명 레위기엔 다리 저는 자는 하나님께 음식 드리지 못한다고 돼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겐 나랏일 하는 건 안되고 신부님 되는 건 상관 없었나보다...

 

 

아무튼 그는 빵빵한 집안 덕에 30대에 오툉 주교직을 맡게 되지만, 언제나 따분한 성직을 혐오해서 답답한 시마라를 벗어 제낄 궁리만 하고 있었다. 

 

 

 

2. 혁명 주교

 

프랑스 혁명

그러던 차에 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혁명을 지지했다.

 

 

그리고는 교회 재산의 국유화라는 급진적인 주장과 함께,

 

 

바스티유 습격 사건 1주념 기념미사를 집전하자,

 

 

교회에서는 파문을 당하는 동시에 혁명 세력에게는 '혁명 주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맨 오른쪽 캅빠 입은 사람이 탈레랑

 

그는 이때부터 혁명 정부 소속으로서 외교업무에 있어 중책을 맡았으나,

 

방데 전쟁

 

마슈쿨 학살
루이 16세의 처형

 

급진적이었던 그에게도 혁명은 점차 두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악파가 집권하고, 국왕은 처형당했기에 영국에서의 그의 업무는 무의미해졌고,

(군주의 처형으로 인해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고립)

 

 

사방에서 귀족들이 차례로 목 따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아예 영국으로 망명해버리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쫓겨나버린 탈레랑은 기회를 찾아 아예 신생국이었던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큰 돈을 벌었다.

 

 

그의 방탕한 생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들 한다.

 

 

오툉의 주교에서 혁명 정부의 일원으로,

 

 

추방된 런던의 외교관에서 미국의 성공한 망명자로,

 

 

이 까지만 해도 충분히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아직 그의 줄타기 인생은 끝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업보 터진 로베스피에르의 턱과 목이 날아가버리자, 그는 프랑스로 귀국할 수 있었다.

 

 

돌아온 고국에서 그는 영국과 미국의 외교통을 자처했고, 뛰어난 연설을 통해 새로 수립된 총재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 당시 미불관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프랑스와 미국은 미국이 태어날때부터 오랜 동맹이었고,

 

 

미국은 오랜 구대륙 친구가 드디어 공화국이 됐다는 소식에 기뻐하고 더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공포 정치 기간동안의 단두대 퍼레이드 소식을 전해들으며 미국에서도 '아, 이건좀...' 이라는 반응이 (특히 친영적인 연방파를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프랑스가 혁명전쟁을 벌이며 온 세상을 적으로 돌려버리자, 신생국이었던 미국 입장에서는 외교 부담으로 인해 프랑스 손절각을 서서히 안볼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영국과는 제이 조약을, 그리고 스페인과는 핑크니 조약을 맺는 등 유럽 국가들과의 오랜 앙금을 풀고 미래를 바라보려고 하는 행보를 보이는데,

 

 

당시 미국 내에서도 친불파(공화파)와 친영파(연방파)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프랑스는 미국의 이런 손절행보에 극대노했고 미국과의 관계는 거의 전쟁 직전으로 치달아 각종 외교보복이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연방파 출신 대통령이던 애덤스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연방파 내의 여론을 잠재우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야, 프랑스. 우리 대화 좀 할래? 지금 우리나라 여론 큰일나서 니네한테 선전포고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지? 우리가 남도 아니고... 그냥 동맹관계만 폐기하고 서로 노터치할래? 이제 그만 서로 갈길가자. 아 근데 가는 길에 영국애들이 가끔 우리 해안가에서 벨튀하는거 발견하면 좀 막아줄래?(아 글고 너네가 우리 독립전쟁할때 빌려줬던 돈 그건 프랑스 '왕국'이 빌려준거니까 안갚아도 되지?ㅎㅎ)"

 

 

하는 합의이혼신청서를 비공식적인 루트(탈레랑)으로 제출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미국통 탈레랑은,

 

 

"흠... ㅇㅋ. 근데 대신 뇌물로 25만달러하고 차관좀 주셈. 니네가 먼저 영국하고 바람핀거니까 위자료 줘." 

 

 

라는 반응을 보였고,

 

 

특사들이 이 굴욕적인 제안을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와버리자,

 

 

미국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미국측 외교관으로 파견된 핑크니는 이때 "단돈 6펜스도 줄수없소! No, no, not a sixpence!" 라고 했다고함)

 

당시 영국의 만평. 프랑스 남자 다섯명: 우효www 이혼할거면 이혼비를 내라구~ (영국은 멀리서 비웃으며 관망중)

 

이후 선전포고없이 해적들처럼 서로의 배를 부수고 나포하는 '유사전쟁 (Quasi-guerre)'이 시작되었다.

 

 

이 외교 사건은 훗날 XYZ 사건으로 불리게되고, 탈레랑의 몇 안되는 실책으로 남는다.

 

 

그러던 중 탈레랑은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한 남자의 가능성을 알아본다.

 

 

그는 나폴레옹이었다.

 

 

대관식에서의 탈레랑

다시 시작된 총재정부와 나폴레옹 사이의 줄타기 과정에서 그는 오랫동안 나폴레옹과 서신을 교환했고, 쿠데타를 지지해 나폴레옹을 지근에서 모시게 된다.

 

 

또다시 이전에 성직자 신분이었던 것을 활용하여, 교황과 황제 사이를 오고가며 둘의 사이를 중재했고, 이내 자신도 파문에서 풀려난다.

 

 

그는 이후 외교 담당을 하며 각국의 명사들과 인맥을 다졌고, 베네벤토 공국의 지배자가 되는 등 제국의 강력한 장관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는 이내 나폴레옹의 영토확장 야욕을 프랑스의 국익에 있어서 재앙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상황이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였는데,

 

 

나폴레옹 또한 방탕하고 부패한 그를 두고 '비단 양말 신은 쓰레기 새끼'라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하며...

 

 

공개적으로 욕 쳐먹어서 기분상한데다가 나폴레옹의 패망각을 본 탈레랑은 다시 한번 줄타기 각을 재게 된다.

 

 

"이 도둑, 겁쟁이, 불신자여!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평생 모든 의무를 다하지 못한 놈이다. 너는 모든 사람을 속이고 배신한 놈이다. 너는 신성하지 않아. 너는 네 아버지도 팔 놈이다! 나는 네게 재물도 잔뜩 줬어! "

 

- 나폴레옹, 1809년, 중신(重臣)이면서도 자신을 향한 음모를 꾸몄던 것이 들통난 탈레랑에게.-

 

 

이후 탈레랑은 적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비밀 자금을 지원받는 등,

 

 

부르봉 왕정복고를 위해 암약하게 되었다.

 

 

그는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늘 프랑스의 국익과 안정(과 본인의 부와 명예)를 생각했고,

 

 

이후 그가 활약할 회의에서 그 결실이 맺어진다.

 

 

 

 

3. 회의는 춤춘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된 이후 1814년, 빈에는 열강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캐슬레이 경
메테르니히. 그도 탈레랑처럼 유명한 호색한이었다.

메테르니히나 캐슬레이보다 십수년이나 나이가 많은 탈레랑은 인생의 단맛 쓴맛 모두 맛봤기에,

 

 

이 귀여운 외교관 후배들에게도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고자 했고,

 

 

파리 최고의 요리사들과 식재료를 대동했다. 

 

요리사 마리 앙투안 카렘

이전에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후원 아래,

"이보다 더 그림같은 공원을 소유한 임금은 일찍이 없노라" - 조르주 상드

 

그림같은 발랑세성을 소유한 뒤 수많은 요리사들을 내리 후원하며, 외교적인 목적이라고 정당화 한 뒤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웠는데, 

 

 

천재 요리사 마리 앙투안 카렘은 그 과정에서 얻게된 소중한 인재였다. 

 

 

탈레랑은 본인의 사유지에서 나는 각종 신선한 허브와 야채들을 비롯한 재료들, 그리고 소스들을 제공했고, 매일 1시간씩 그와 상담시간을 가질 정도로 요리에 진심이었던 상사였다고 한다.

 

 

탈레랑 말고도 열강의 지도자들은 제각기 회의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본인들을 뽐냈는데,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는 1,400여 마리 말들을 끌고 왔으며,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사절단만 무려 다섯이나 보냈다.

 

 

근데 이딴것들보다 역시 맛있는 음식이 최고였겠지...

 

 

이밖에도 빈에는 각종 압력단체들,

 

 

이를테면 국제저작권법을 만들어달라는 독일의 출판업자들이나 유대교 장로들, 슈바벤, 베터라우, 몰타의 기사들, 전재산을 잃은 독일의 소영주들, 노예무역폐지론자들에다가 심지어는 북미 이로쿼이 부족의 사절단까지 몰려들었다.

 

 

이렇게 빈에 모인 수많은 귀족들은 연일 파티를 해댔는데,

 

 

그 유명한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고,

(미적대던 회의는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과 함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귀족들은 춤뿐이 아니라 쳐먹기도 어마어마하게 쳐먹어댔다.

 

 

'대포보다 냄비'

 

 

"좋은 셰프를 주시면 좋은 조약을 드리지요"

 

 

라는 말로 대표되는 탈레랑의 요리외교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아마 승전국가의 귀족들은 프랑스 음식을 맛보며 이 나라는 멸망시키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암튼 이와 대비되게, 당시의 빈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거리에 고아와 거지들이 넘쳐나던 상황이었고,

 

 

이를 불쌍히 여긴 영국의 럼퍼드 백작이

 

https://en.wikipedia.org/wiki/Rumford%27s_Soup

 

Rumford's Soup - Wikipedia

Nutritional Mixture Rumford's Soup (Rumfordsche Suppe, also called economy soup)[1][2] was an early effort in scientific nutrition. It was invented by Benjamin Thompson, Reichsgraf von Rumford, circa 1800 and consumed in Munich and greater Bavaria,[2] wher

en.wikipedia.org

훗날 럼퍼드 수프로 불리는 영양만점의 야채죽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여러 주인을 갈아치운 그를 풍자하는 만평. 6개의 대가리를 가진 탈레랑. "자유 만세!" "명사회 만세!" "제 1 집정관 만세!" "황제 만세!"  "국왕 만세!" "...만세!"

 

 

이 세계 최초의 국제평화회의의 주요 국가는 본래 전승국 취급을 받던 4개국이 될 터였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그러나 탈레랑은 회의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훌륭한 요리로 상대방의 혀를 마비시키는, 미스터 초밥왕에나 나올법한 전략과 함께,

 

 

회의의 결과를 우려하는 약소국가들을 포섭하는 등, 교묘한 술수를 써 그 안에 프랑스를 낑겨 넣을 수 있었고,

 

 

거기다가 승전국들이 영토분할로 인해 갈등을 일으키자, 그 상황에서 또 다시한번 영혼의 줄타기를 벌여...! 

 

 

훗날 베르사유 조약에서 벌어졌던 승전국 대 패전국이라는 대립구도와는 다르게 이는 기묘한 균형을 이루는 회의를 이끌어내게 되었으며,

 

이렇게 세워진 빈 체제는 이후 100년 동안의 유럽 평화 시대, 벨 에포크의 초석이 된다.

 

 

 

 

 

 

 

그러나 탈레랑이 잘 놀리던건 혓바닥 뿐이 아니었으니...

 

 

4. 사생활

 

"여자는 때때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남자는 용서하지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는 남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 탈레랑

 

그는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돈이 많았고,

 

 

거기에다 화려한 언변까지 갖추고 있었던데다가,

 

 

여자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그는 한 때 성직에 몸 담았으나 파문당한 뒤엔 더 이상 거리낄게 없어졌다.

 

 

나름 믿음과 욕정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느라 고뇌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회고록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게, 루이 16세 즉위식에 대한 언급을 보면 귀부인들 누구누구랑 재밌었다는 것밖에 없다.)

 

 

사생아를 20명이나 넘게 둔 것을 보면 결국 욕정에는 져버린듯 하다.

 

 

그는 이곳 저곳에 자신의 씨를 뿌렸고,

 

플라오 백작 샤를Charles, comte de Flahaut

훗날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불륜 관계를 갖는 플라오 백작(거의 확실),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그리고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심)가 그의 피를 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는 단순히 욕정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닌데,

 

 

당대의 외교관에게 가장 중요한 첩보원이자 정보요원은 곧 귀부인들이었기에 나름 그에게 있어 여자들은 외교적 도구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뇌물에 대한 집착은 앞서 언급했던 XYZ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탐욕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쳤다.

 

 

그의 삥뜯기는 강력한 프랑스 육군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것이라, 독일의 소국들이 아닌 바다 너머의 미국한테는 통하지 않았고 외교적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탈레랑은 게으른 천재였고, 또 게으름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따분하기 짝이없었던 공문서 작성은 전부 부하들을 시켜서 대신 쓰게 하고 마지막에 훑어본 뒤 수정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부하들에게 "나대지 마라"는 말을 말버릇처럼 하던 그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열광, 흥분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해 언제나 적당한 선을 지켰고,

 

 

일생동안 파문과 용서, 죄악과 선행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그와 교회의 관계도 말년에 가서는 가까스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가 죽기 몇시간 전, 일전에 그를 파문했던 교회는 그에게 종부성사를 허락했고,

 

 

그는 혁명 이후에 교육받아 구체적인 의식을 잘 알지못해 손바닥에 기름을 바르려 하던 사제에게 손등을 내밀어 보이는 식으로 정정해주는 등,

 

 

그 파란만장한 줄타기 인생의 마지막 끝까지 파격적인 존재감을 뽐내다가 세상을 떴다.

 

 

 

 

5. 명언 제조기

 

 

정치인의 중요한 기예 하나는 대중들에게 경멸받는 기관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헉...!)

 

뛰어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정부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예이다. 그러나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어디에 둘지를 정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크킹 명언)

 

1789년에 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즐거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1789년은 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외교관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를 의미하고, "아마도"라고 하는 것은 "아니오"를 의미하며, "아니오"라고 말하는 외교관은 외교관이 아니다.

 

여자는 때때로 자신을 유혹하려는 남자는 용서하지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는 남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너무 심하게 깎아내리더군. 극찬이야

 

앞으로 수백년동안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계속,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가 똑똑한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보다는 누가 바보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비하하지 마라. 그건 네 친구들이 충분히 하고 있을테니.

 

종교는 32갠데, 소스는 하나뿐인 나라가 있더군.

(그 나라)

 

 

 

정권은 무너지고 멸망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아.

 

 

 

 

그는 이미지와 다르게 과묵한 편이었는데,

 

 

식사시간엔 음식 먹는 것에 열중해서 몇마디 하질 않던 그가 가끔가다가 입을 열때면,

 

 

촌철살인의 뼈가 있는 말이 주로 던져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탈레랑의 명언이라고 전해지는 말들이 많은데,

 

 

그 유명한 커피에 대한 말,

 

 

Café : Noir comme le diable Chaud comme l'enfer Pur comme un ange Doux comme l'amour.

커피: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는 실은 탈레랑이 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

 

 

 

 

 

 

 

 

---

 

이렇게 길게 쓰고 싶진 않았는데 쓰다보니까 길어졌다....

 

 

오로지 촉한의 이익만을 위하는 제갈량 흑화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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