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옷에 신경안써도 돼서 좋아. 여자가 집중해야 할 때, 옷은 여자의 힘을 빼앗아 버리거든."

 

 

오로르 뒤팽

 

오로르 뒤팽은 ,

 

 

오로르의 아버지, 모리스 뒤팽

 

나폴레옹의 위대한 기병대장 조아킴 뮈라의 부관이자 폴란드 왕실의 혈통을 잇는 고상한 혈통의 아버지,

 

뮈라 장군을 만난 어린 시절의 오로르

 

 

그리고 비천한 여관주인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오로르 뒤팽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와 어렸을때부터 사이가 좋았다.

 

 

나이가 꽤나 찰때까지 엄마와 같은 침대에서 함께자곤 했으니까.

 

 

그런 오로르를 본 할머니는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그린 어린 시절의 오로르

 

 

"네 엄마는 사생아를 낳은 막돼먹은 년이니까 너와 함께 살면 안된단다."

 

 

오로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점차 방황해서 발랑까진 아이가되었다.

 

 

특히 이때 할머니가 같은 사생아라도 배다른 오빠와 배다른 언니를 차별하는 것을 보고 여자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기도 하였다.

 

 

반항아가 된 손녀를 못마땅해하던 할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숙사에 들어간 뒤에도, 오로르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현자, 악마, 그리고 바보로 나뉘는 기숙학원의 카스트에서, 오로르는 악마 중의 악마였다.

 

 

그러나 이내 점점 바보가 되더니,

 

 

종국에는 (어머니처럼) 가장 신앙심 깊은 현자가 되어 수녀원에 들어가고 싶어할 정도로 정숙한 소녀가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아 손녀의 신앙심을 탐탁치 않아하던 할머니에 의해 노앙으로 끌려가버렸고,

 

 

오로르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이때, 이후로도 그녀의 사상에 꾸준히 영향을 미칠 지적 거인들의 서적을 탐독할 수 있었다. 

 

(장 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프란시스 베이컨, 몽테스키외, 미셸 드 몽테뉴, 존 로크 등등등)

 

 

 

 

그녀가 남장을 하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영국과 달리, 당시 프랑스에서 여자가 말을 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이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었기에,

 

 

그녀의 첫번째 남자친구였던 스테판 드 그랑사뉴가 권유한 것이었다.

 

 

오로르는 남자 옷을 입는 것이 좋았다.

 

 

"힘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후로 계속 외출할때마다 남성복을 입었다.

 

 

 

오로르

오로르는 말을 타고 남성복을 입고 다니는 등, 당시 기준으로 조금은 독특한 여성이었지만, 집안의 내력인 남성편력과는 거리가 먼 정숙한 여성이기도 했다.

 

 

오로르는 첫번째 남편인 카지미르 뒤드방과 결혼할 때까지 숫처녀였고

(이는 그 집안에서 오로르가 유일한 사례였다고 함),

 

 

결혼 초기에는 요조숙녀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애 취급할 뿐이었다.

 

 

그 당시의 많은 구혼자들처럼 카지미르에게 있어서 오로르는 단지 뒤팽 가문의 상속녀일뿐이었다.

 

 

 

오로르와 그의 남편 카지미르

그뿐아니라 그는 폭력적이었으며 교양이 없었다. 

 

 

특히 오로르가 관심을 많이 가지던 문학이나 예술, 과학, 사상 같은 것에는 일자무식이었다.

 

 

결혼생활은 이내 파국으로 치달았고, 어느날 오로르는 남편의 커피에 모래를 집어넣는 식으로 사소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아내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 사건은 그녀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 끝은 목표이지, 재앙이 아니다."

조르주 상드

 

 

그녀는 피레네 산맥으로 여행을 간 이후, 그곳에서 본 경치를 마음에 새긴 뒤 젊은 여성으로서 홀로서기를 다짐했다.

 

 

그녀는 가출했고, 이때부터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녀는 결혼 이전 으레 그랬듯, 남성복을 입고 다녔는데, 이는 승마할때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당시 남성복이 여성복보다 훨씬 쌌고, 내구성도 좋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복장에 따른 차별대우도 있었다.

 

 

오로르는 남성복을 입으면 극장의 좋은 좌석을 싼값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복장 뿐만 아니라 이름도 바꾸기 시작했다.

 

 

르 피가로에 소설을 투고할 때 썼던 필명, J.상드에서 G.상드,

 

 

그리고 Georges에서 George로,

 

 

약간씩의 변형을 거치지만 최종적으로 그녀는, 조르주 상드 (George Sand)로 불리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녀의 연인으로 유명한 쇼팽은 그녀를 오로르로 불렀다고 한다)

 

 

 

그녀가 쓴 소설은 불티나게 팔렸고 샤토브리앙을 비롯한 뭇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찬사를 받았다.

 

 

 

"인생의 행복은 오직 하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야."

 

 

그러나 그녀의 남성편력은 남성들의 비난으로 이어졌다.

 

 

토머스 칼라일은 그녀를 두고, "새로운 남근신앙을 위한 교조"라 비난했으며,

 

보들레르는 "공중변소"라 모욕했다.

 

 

동시대 사람은 아니지만, 니체 또한 그녀를 "글 쓰는 암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녀가 마리 도발이라는 여배우와 레즈비언 관계라는 근거없는 중상모략도 있었다.

 

 

그러나 상드는 일평생 남성에게 상처입은 여성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을 뿐이었다.

 

 

이미지만큼 여장부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향적이었으며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듯 했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녀는 여성해방에 있어서도 온건한 여성해방론을 주장했다.

 

 

"여성은 멍청하면 욕먹고, 똑똑하면 조롱받으며, 사랑할땐 창녀 취급에, 결혼하면 노예 취급을 받는다" 고 일기장에 썼지만,

 

 

동시대에 전개되었던 여러 급진적인 여성해방론에는, "유치하다"고 까지 말하며,

 

 

가사노동의 가치를 옹호했다.

(상드는 바느질을 잘했고, 좋아했다.)

 

 

그녀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욕에 대해서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만큼이나 성욕이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원하기에 성에 속박될수밖에 없으며, 

 

 

여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여러 남자들을 섭렵하는 화려한 남성편력이 아니라,

 

 

단지 사랑이었다. 

 

 

그녀는 일생동안 만난 그 어떤 연인에게서도 그녀가 갈구하던 사랑을 채울 수 없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는 성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그녀의 비밀일기에는 연인과 헤어지던 날,

 

 

"그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교회 돌바닥이 닳도록 무릎꿇고 기도할 것"이라는 내용이 쓰여있었다고 한다.

 

 

 

 

1864년의 조르주 상드의 사진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