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遙望建康城

저 멀리 건강성 보니


小江逆流縈

작은 강 거꾸로 흘러 엉켜있네


前見子殺父

앞을 보니 자식이 아버지 죽이고


後見弟殺兄

뒤를 보니 동생이 형 죽이네

 

 

 

 

음행(淫行), 

 

 

 

폭력, 

 

 

그리고 마약(한석산寒石散: 광물질 마약)으로 점철된 시대였던 중국의 남북조 시대.


 

특히나 폭군 제조기 국가로 불리는 나라가 있었으니,

다른 시대의 송( 宋) 나라들과 구별하기 위해 황성인 유(劉)씨를 앞에 붙인 이름이다.

 

바로 남조의 유송(劉宋)이었다.

 

 



오늘은 이 나라에서 별의 별 기행을 다하다가 겨우 1년만에 비참하게 골로간 희대의 폭군,



송전폐제(宋前廢帝) 유자업



전폐제 유자업에 대해 알아보자.

 


 

 

 

 

1. 우당탕탕 유씨집안

 

 

그의 큰아버지는 이른바 원흉(元凶) 유소(劉劭).

 

 

송문제 유의륭. 유소와 유준의 아버지, 유자업의 할아버지

태자였음에도 자신의 아버지인 문제 유의륭(유자업의 할아버지)을 시해한 뒤, 황위에 오른 자였다.

 

 

유의륭은 칼을 들고 덤비는 아들의 수하에게 궤안(의자)을 집어던지는 등 저항했으나 끝내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는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깔끔하게 아버지를 컷한 유소는 연호를 태초(太初)로 정하였으나,  

 

 

패륜아 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무릉왕 유준(劉駿)에 의해 3개월만에 황위를 찬탈당해버리고,

 

 

아들들과 함께 살해당한 뒤, 격하되어 원흉소라는 굴욕적인 칭호로 역사에 남게된다. 



무릉왕 유준은 형 뿐만아니라 당시 형수들과 조카들마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는데,

 

 

형수는 채찍으로 쳐죽였고, 나머지 첩들과 조카들은 옥에 가둬 독살했다. 



이때 당시 도성에서의 자행된 유준 군(軍)의 보복전에 대해서,  사서에는

 

 

 割腸刳心,臠剖其肉,諸將生噉之,焚其頭骨

내장을 가르고 심장을 뜯어냈으며, 그 고기를 잘라 살점을 찢어 여러 장수가 생으로 먹고,  두개골을 불살랐다.

 

 

는 말이 있을정도로 잔혹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형과 조카들을 잔인하게 죽인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즉위한 무릉왕 유준은,

 

 

훗날 그에 걸맞는 효무제(世祖 孝武皇帝)라는 시호를 갖게되는데,

 

 

이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유자업의 아버지되는 사람이다.

 

 

그는 책과 서간을 읽을 때 7행을 동시에 읽었고,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으나 인성은 어딘가 비틀린 사람이었다.

 

 

어느날 효무제가 신하들과 함께,

 

 

그의 할아버지이자 유송의 창업군주인 고조 무황제 유유가 생전에 거주했던 방에 들어가보는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황제는 침상의 머리맡엔 흙으로 된 토담이, 벽 위에는 칡으로 만든 등불 켜는 걸개와 마麻로 만든 먼지떨이가 걸려있었던 것을 보게 되었다.

서민 대통령 유유. 문제 유의륭의 아버지, 효무제 유준의 할아버지, 전폐제 유자업의 증조할아버지



함께있던 시중 원기가 감탄하며 유유의 검소함과 그 덕을 칭송하자, 효무제는 표정을 구기고는 싸늘한 말투로 일축했다.

 


“농사나 짓던 노인에게는 과분하군.”

 

 

(근데 사실 이건 그냥 생각없이 내뱉은 패륜적인 말로도 볼 수 있긴 하지만, 은근히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가 드러난 말일지도 모르겠다. 황제가 뭔 가문 컴플렉스냐 하겠지만은, 당시 남조의 귀족들은 무장 출신으로 벼락 출세한 황실을 은근히 업신여겼고, 한문寒門(서민)을 귀족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제아무리 황제라도 마음대로 못할 일일정도로 카스트가 엄격한 동네였다. 유송의 창업군주 유유도 한문 출신이었다. 약간 지금으로 치면 )

 

 

효무제는 말년이 되자 이전보다 더욱 탐욕스러워졌고, 종일토록 술에 취해 도박을 즐겼다. 

 

 

그러나 신하들의 급한 상주가 있을때엔 용모를 단정히 하여 하나도 취한 기색이 없었으니, 모두들 그런 황제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효무제는 옥촉전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 즉위

 

在慼而有嘉容 是謂不度

상중에 있음에도 슬퍼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빛이 기쁘니, 이를 두고 불도不度라 한다.

-左傳-

 

 

 

유자업의 쎄한 느낌은 즉위할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로 즉위하게 된 만 16세의 황제는 느릿하고 거만하게 행동할 뿐, 안색에서 슬픈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는 친어머니인 왕태후의 병이 유독해지자 그녀가 황제인 그를 불렀는데,

 

 

유자업은 태연히 이렇게 말했다.

 

 

"병에 걸린 사람 방에는 귀신이 많은데, 어찌 가겠는가?"

 

 

왕태후는 그 말을 듣고 시종에게 외쳤다.

 

 

"칼을 가지고 와서 내 배를 가르거라! 어찌 저리 비린내나는 녀석을 낳았는가!"

 

 

얼마 뒤 황태후가 죽었다.

 

 

이 해의 건강(建康)에서는 열명 중 일곱 명 꼴로 굶어 죽었다.

 

 

3. 대법흥을 죽이다

 

궁중에는 천자가 둘 있다. 대법흥은 진짜 황제요, 관(官)은 가짜 천자다.

-당대의 요언(謠言)

 

 

왕태후가 죽고 나서 유자업도 나이가 찼다. 

 

 

그러나 여전히 실권은 포악하고 멋모르는 황제 대신, 효무제 이래의 중신이었던 대법흥(戴法興)이 가지고 있었다.

 

 

대법흥은 유자업이 하고자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이렇게 말했다.

 

 

"관(官)에서 이처럼 한다면 장차 영양(營陽)이 될 것입니다!"

 

 

영양은 곧, 유유의 장남이었으나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폐위된 소제 영양왕 유의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황제는 마침내 대법흥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낸 뒤, 죽음을 내렸다.

 

 

대법흥이 죽은 다음날, 그의 아들들도 죽임을 당했다.

 

 

대법흥이 죽자,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떨며 불안해하였다.

 

 

4. 귀신 눈알 떡

 

유원경과 안사백은 황제를 폐위시키고 강하(江夏)왕 유의공(劉義恭)을 대신 세울 음모를 꾸몄다.

 

 

유의공은 유유의 4남이자, 유자업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음모는 발각되었고, 황제는 직접 근위대인 우림병(羽林兵)을 이끌고 유의공 토벌에 나섰다.

 

 

유의공은 살해된 뒤, 사지가 절단되고 창자와 위가 갈라져 찢겼으며, 눈알은 후벼파져 꿀에 담겼다.

 

황제가 꿀에 담긴 눈알을 귀목종(귀신 눈알 떡鬼目)이라 불렀다.

 

 

종(粽)은 꿀에 담근 떡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유원경과 그의 여덟 아들, 여섯 동생들과 조카들이 모두 죽었다.

 

 

안사백과 그의 여섯 아들이 모두 죽었다.

 

 

강하의 세자, 유의공의 아들인 유백금이 주살되었다.

 

 

연호를 고쳐서 경화(景和)라고 하였다.

 

 

 

 

5. 산음공주

 

 

 

 

 

산음공주는 황제의 누이였다. 

 

 

하루는 황제에게 산음공주가 말했다.

 

 

"소첩과 폐하는 비록 성별은 다르나 같은 씨앗에서 태어났습니다. 폐하는 육궁의 궁녀 만여 명을 거느리시나 소첩은 오직 부마 하나 뿐이옵니다.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옳다 여겨, 공주로 하여금 좌우에 얼굴이 곱고 머리칼이 아름다운 남자 30명을 두게 하였다.

 

 

이로도 만족하지 못한 공주는 이부랑 저연을 탐하여 황제에게 이를 요청했다.

 

 

저연은 저담지의 아들로서, 공주에게는 고모부 되는 사람이었다.

 

 

저연은 열흘 간 공주의 수발을 들었고, 죽기를 맹세하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6. 초상화

 

 

 

하루는 황제가 선조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증조부 유유의 화상을 보고 황제는 말했다.

 

"위대한 영웅이시다. 천자를 여러명이나 사로잡으셨도다."

 

조부 문제 유의륭의 화상을 보고 황제는 말했다. 

 

 

"역시 위대한 분이시다. 그러나 말년에 자식한테 머리터져 죽는 일을 못면하셨지."

 

 

아버지 효무제의 화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코가 빨갛지 않다. 분명 술독이 올랐을 터인데 왜 빨갛지 않은거야? 화공은 어서 코를 빨갛게 그려라!"

 

 

 

7. 친족살해

 

 

은귀비 소생의 이복동생이었던 신안왕(新安王) 유자란은 생전의 효무제에게서 총애를 받았다. 

 

 

유자업은 그를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즉위한 뒤 곧바로, 10세에 불과한 이복동생에게 사약을 내렸다.

 

 

유자란은 죽기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세에는 반드시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그의 친동생 남해왕 유자사를 죽였다.

 

 

유자사는 죽을 때 여섯 살이었다.

 

 

또한 그의 친여동생을 죽였다.

 

 

그들의 어머니 은귀비의 묘 또한 파냈다. 

 

 

아버지인 효무제가 묻힌 경덕릉까지 파내려고 했으나 태사가 말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 근친상간

 

 

영삭장군 하매는 황제의 고모되는 신채공주의 남편이었다.

 

 

황제는 신채공주를 후궁에 들이고는,

 

 

공주가 죽었다고 속인 뒤, 궁중의 비녀 하나를 죽여 하매에게 보내 장사지내게 하였다.

 

 

하매는 분을 참지 못하고 황제를 폐위시키고자 하였으나, 모반이 들켜 살해당했다.

 

 

유자업은 그녀를 귀빈으로 삼아 사씨성을 주었다.

 

 

 

9. 궁궐에 넘치는 불안한 기운

 

백면서생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심경지는, 안사백과 유원경의 모의를 황제께 고한 이후로 황제의 측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황제에게 진심을 다한 충언을 아끼지 않았고, 황제는 그런 그를 서서히 껄끄러워하게 되었다.

 

 

불안해하는 심경지에게 채흥종이 다가가 말했다.

 

 

"주상께서는 인륜의 도가 없으시며 덕행 또한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채흥종은 심경지에게 반란을 독촉했다. 

 

뿐만아니라 조카였던 청주자사 심문수를 비롯한 심씨 일가의 여럿이 그에게 유세하였다.

 

 

그러나 끝끝내 심경지는 눈물을 흘리며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황제가 영삭장군 하매를 죽였다.

 

 

황제는 심경지가 또 잔소리하리라 생각하고는 심경지의 당질, 직합장군 심유지를 보내 사약을 내렸다.

 

 

심경지가 마시려 하지 않자 심유지는 심경지의 얼굴을 덮어 질식시켜 죽였다.

 

 

심경지의 나이는 여든이었다.

 

 

황제는 심경지가 병사했다고 속인 뒤 시호를 충무공(忠武公)으로 하였다.

 

영군장군 왕현모가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사람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 간하였고, 황제는 격노했다.

 

이에 저잣거리에서 왕현모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채흥종이 사람을 보내 포섭하려 했다. 

 

 

 

왕현모는,

 


"쉽게 일으킬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발설하진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우위장군 유도륭이 어느날 채흥종의 뒤를 지나쳤다.

 

 

채흥종이 말했다.

 

 

"유군! 조만간 한사(閒寫)할까 합니다!"

 

 

한사(閒寫)란 한가하게 생각을 끄적이는 것을 말한다.

 

 

유도륭이 그의 손을 꼬집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 말을 하지 마시지요."

 

 

이미 황제는 천명을 잃은 지 오래였다.

 

 

 

10. 동물원

 

 

황제는 여러 삼촌뻘되는 황족들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을 모두 수도 건강에 가둬두고는 갖가지 방법으로 능욕하곤 하였다.

 

 

 

가장 살찐 상동왕 유욱을 두고 돼지왕이라 하였으며,

 

 

건안왕 유휴인은 살인殺왕,

 

 

산양왕 유휴우는 도적賊왕,

 

 

성격이 무던한 동해왕 유위는 노새왕으로 불렀다.

 

 

그중에서 노새왕을 제외한 나이많은 세 명의 왕을 항상 포박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뒤 물을 채워 흙탕물을 만들었고, 그 안에 세 왕을 쳐넣고는,

 

 

여러 음식물을 이러 저리 섞어서 누렁이밥이 된 것을 나무통에 담고는 그 안에서 기어서 먹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그들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만도 십수번이었으나,

 

 

그때마다 살인왕 유휴인의 기지로 인해 그들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황제가

 

 

"오늘은 멧돼지를 잡는 날이다!"

 

 

라고 하며 돼지왕 유욱을 죽이려고 하면,

 

 

"돼지는 아직 죽이면 안됩니다! 아드님이 태어나실 때까지만 조금 기다렸다가 간과 폐를 꺼내 죽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황제의 분노를 푸는 식이었다.

 

 

 

11. 유자업의 최후

 

어느  날 황제는 여러 후궁과 공주들을 불러 일렬로 서게 하였다.

 

 

그리고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들을 겁탈하도록 시켰다.

 

 

남평왕 유삭의 비妃인 강씨는 이에 따르지 않으며 저항하였다.

 

 

황제는 그녀의 세 아들 남평왕 유경유, 여릉왕 유경선, 안남후 유경연을 모두 죽였다.

 

 

이후 강씨에게 채찍 100여대를 내렸다.

 

 

하루는 황제가 화림원 죽림당에서 궁인들을 발가벗긴 뒤 서로 쫓도록 하는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궁인이 명령을 따르지 않자 목을 베도록 하였다.

 

 

그날 밤 황제는 꿈속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는 황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패악무도하니 내년 곡식이 익을 때까지 가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다음날 꿈 속에서 본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죽였다.

 

 

죽은 사람이 다시 꿈에 나타나 욕하였다.

 

 

황제는 무당들을 불러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 수백명과 함께 귀신을 활로 쏘았다.

 

 

 

귀신들이 모두 죽은 뒤, 음악이 흘러나왔다.

 

 

 

황제의 눈 앞에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수적지였다. 

 

 

 

황제는 급하게 들고있떤 활을 빼들어 화살을 쐈지만 맞지 않았다. 

 

 

여자들은 이리저리로 도망갔고, 황제도 소리를 치며 달아났다.

 

 

"적...적...적...!"

 

 

수적지의 이름 앞글자를 크게 세번 더듬으며 외치다가, 황제는 잡혀 죽었다.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상동왕께서 태황태후의 명령을 받드시매 폭군을 없애시고 이미 평정하시었다!"

 

 

건안왕(살인왕) 유휴인이 비서성에 가서 상동왕(돼지왕) 유욱을 접견하고는,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하였다.

 

 

상동왕 유욱이 이에 버선발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유자업의 친동생, 예장왕 유자상은 형을 닮아 성정이 포악하였다.

 

 

유자상과 산음공주가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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