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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용인用人은 재주만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마땅히 가계와 출신부터 살펴보셔야 하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무형의 하늘을 하늘답게 만들고, 산봉우리와 바다와 강이 무형의 땅을 땅답게 만들듯이, 대가세족大家世族은 대국을 대국답게 만듭니다. 대가세족이 있어 간웅姦雄이 감히 기회를 잡지 못하니, 내란이 일어날 여지가 없습니다. 대가세족은 초석과 방벽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지킵니다. 이는 외세의 굴욕적인 요구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필자가 고딩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학교에서 dbpia 권한 얻어서 조선시대사 논문을 훑어보던 때의 일임.

 

 

그때 내 관심사는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가문을 말아먹었던 주요인물들 개개, 그리고 그들과 이후 사림파와의 연관성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미친듯이 얽혀있는 혈연관계의 향연과 번역 따위 있을리 없는 듣보잡 인물들의 문집의 한문스압에 지쳐 나가 떨어져버렸었다. 

 

 

그 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 중에 한가지는 생각보다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조선시대 전기의 여러 정치집단들끼리 하나로 엉켜있다는 감각이었음. 단종복위운동의 주체들끼리는 통혼권으로 서로 얽혀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세조대의 훈척공신들과도 학문적 배경을 같이했는데, (집현전학사들) 거기다가 정난공신이든, 단종복위운동세력이든, 파워가 앵간했던 핵심인물들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고려에서 한따까리 했던 주요 문벌귀족 가문들의 후손들이라는 것도 거의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음.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대충 한국사에 흥미를 잃어서 한동안 손놓고 있다가 최근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 대충 훑어 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때까지 외국인 학자가 쓴 한국사 책을 언젠간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조선왕조의 기원같은 것들) 하다가 게으르게 미뤄두고 있던 것 같아서 이 책을 좀 유심히 훑어봤는데 문체가 뭔가 외계 문명을 탐구하는 듯한(이건 아마 사회학 서적 특인거같다) 느낌이라 뭔가 삘이 딱 꽂혀서 바로 빌려버리게 되었음

 

 

 

"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 출계집단의 기원과 역할, 발달을 신라 초기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는 장기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기술하는 것이다. 한국 친족제도의 중심에 있는 출계집단에 초점을 맞춘 이 작업은 시공을 통해 사회적인 것이 한국인의 삶 구석구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조명해준다. [중략]  정치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것을 우위에 둠으로써, 엘리트층은 자신들의 우월한 신분을 정치적 기능이 아니라 입증된 선계先系로부터 이끌어냈다. - 본서 p. 705

 

 

 

 

집에와서 책읽는 건 좀 미뤄두고 알아보니까 몇년 전 출판된 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지난 1500년간 '친족 이데올로기' 가 한국사회를 지배하였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과 벽안의 외국인 교수님이 수십년간 공부한 한국학 내공을 쏟아부은 1000페이지 분량의 벽돌)으로 꽤 화제를 끌었다고 한다.

 

 

대충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어도 다수의 비엘리트층과 명확히 구별되는 소수 엘리트층은 한정된 출계집단descent group 내에서 강한 귀족적 특징을 지니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지들끼리 이리저리 엉킨 혼맥을 통해 뭉쳐가며 중앙에서 권력을 잡아 오랜 시간 동안 장기지속 해왔다는 것인데,

 

 

 

"느 어데 최씨고?" "느그 아부지, 내 형님의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가 바로 익현씨인기라"

 

 

 

이에 덧붙여 도이힐러는 엘리트 계층을 비엘리트 계층과 명확히 구별하는 본질적 요소가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아닌, 출생과 출계와 같은 사회적 속성들이며, 엘리트층은 일부 구성원이 불행한 정치적 시비에 휘말려 탈락하거나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어도 이리저리 이어진 혈맥을 통해 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함.

 

 

우리가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권문세족(개쓰레기오물친원파기황후)vs신진사대부(장하다 백성을 사랑한 정도전,토지대장을 전부 불태워버리렴) 구도도 전부 쌩구라이며, 신진사대부들이랍시고 조선전기에 중앙에서 서로 스승 제자끼리 밀당해주며 깝쳤던 애들도 사실 '대부분'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다들 고려에서 한따까리씩 해먹던 문벌귀족의 후손들이라 사실 장장 일천 오백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극적인 지배층의 물갈이 같은건 없었고(물론 중간에 광종이 한번 다 쳐죽여버리는 일도 있고, 무신정변도 있긴한데 그때도 바퀴벌레처럼 아득바득 살아남아서 번성하면 하지 아예 다른 집단으로 뒤집어지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 성리학을 둘러써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바꾼거지 사실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거임. 

 

 

이 책에 따르면 958년에 광종 시절 도입된 과거제도, 그리고 대륙에서 건너온 성리학도 머나먼 신라 왕국의 뼈 등급 시절때부터 견고하게 이어져온 사회적 구조─토착 친족 이데올로기─를 변혁시킬 순 없었으며 오히려 그것에 삼켜져 버려서 후대의 후손들한테 "에잉 쯔쯧 조센은 센리학을 믿어서..." 라는 식으로 존나 억울한 포지션에서 욕을 존나 쳐먹는 거라고 볼 수도 있음. 엘리트 계층의 경직성을 초래한 것이 성리학 때문이 아니라 그냥 원래 한반도 왕국들은 엘리트 계층이 전통적으로 경직되어 있었고, 성리학도 뭐 좀 해볼라다가 도리어 거기에 먹혀버려가지고 양반되면 군역도 면제되고 그런 사회적 특권이 생겨버린다던지...

 

 

"고려의 세족(世族)이 조선시대에 사족(士族)으로 바뀌었을 따름입니다."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을 보면 재미있는 점을 많이 발견합니다.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는데도 지배 세력이 거의 바뀌지 않았어요. 이런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일합니다."

 

 

근데 도발적인 주장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그리 엄청나게 새로울 것은 없는 것이 와그너, 던컨 같은 외국인 한국학 교수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이야기 해왔던 토대 위에서 나온 주장임. 

"...내재적 발전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지방 향리 출신의 중소 지주라는 배경 아래 정주학을 이념으로 선택했으며 친명 대외 정책을 옹호한 신흥 사대부가 흥기한 결과로 그 사건을 해석했다. 그들은 부재의 대지주로서 사상적으로 불교에 찬동하고 친원 외교 정책을 추구했던 중앙에 기반을 둔 귀족들로 구성된 오래된 지배층을 전복시키고 권력을 잡았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고려-조선의 이행에 관련된 여러 특징을 ‘신흥 사대부’론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점차 굳히게 되었다. 첫째 평양 조씨 출신의 조준과 황려 민씨 출신의 민여익처럼 고려의 주요 가문 출신의 여러 인물은 1392년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 14세기 후반 조정을 장악한 이인임 같은 ‘구 귀족’은 명과 견고한 관계를 맺었고 그들에게서 거절될 경우에만 원에 귀부하는 유연하고 실제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 - p. 18-19

 

 

 

그치만 평소에 역사에 그리 관심없고 그냥 학창시절에 걍 싹다쳐 외우래서 교과서 달달달 외우고 공무원 한국사 공부하고 그런 사람들이 들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칙쇼... 내가 국뽕 조센의 교육에 속았nida... 대일본제국 사학자들의 정체성론이 맞았nida,,, 조센 의 역사은 발전이란게 없는 것?" 할만큼 충격적으로 들릴 주장일 수 있고,

 

 

여기에 더해서 책에 조센의 선비들이 골-든 엘리트 귀족으로서 좆간질 하는 모습이 좀 적나라하게 묻어 나오다 보니까

 

 

("향리들이 강제로 써야했던 흑죽방립은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챙이 넓었다", "향리들은 평민들도 치르는 삼년상도 못 치렀다.", "서얼의 아들과 손자->후손들은 과거 금지", "유학자 曰 노비는 기氣가 혼탁하고 천성이 우둔해, 약간이라도 깝치면 반드시 줘패야지 안패면 기어올라"등등등...)

 

 

이게 더더욱 국내의 조선까들을 흥분시켜서 그냥 바로 무지성 '외국인 한국학 교수들 만만세' 모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외국인 한국학 교수들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를 바로 보고 국내 사학계의 역사학자들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어서 역사를 바로 보지 않고 끼워맞춘다는 그런 프레임이 씌워져 버린 것만 같은데,,

 

 

확실히, 국내 사학계의 소위 말하는 통설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 (장기지속적, 구조적인 것) 보다는 변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사실이며, 그렇게 형성된 통설이라는 것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된 것도 사실임. 

 

 

또, 아무래도 '우리' 역사다 좀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있겠지.

 

 

그치만 그런 이유로 한국 사학계를 값싸게 후려쳐버리고 외국인 학자들만 치켜세워주는 건 조금 안될일인데 왜 그런지는 지금부터 고려-조선 왕조 교체를 중심으로 역사에서의 연속 단절과 학계의 흐름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설명해보겠음.

 

 

사실 나도 이 분야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공부해보려고 써보는것.

 

 

구조와 인간, 연속과 단절에 대하여

 

뤼시앵 페브르마르크 블로크.

 

 

옛날 옛적에 아날학파의 창시자이자 1세대 아날학파로 불리는 이 역사학자들은 이른바 '새로운 역사학' 이라는 것을 들고 나옴.

 

뤼시앵 페브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그것은 모든 역사학의 시작이요 끝이다. 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 단지 이야기, 편집물이 있을 뿐이다.”

 

마르크 블로크

이 사람들은 기존 역사학자들이 세세한 연대年代나 개인, 그리고 정치적 사건을 숭배한다고 비판했음.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정치에서 사회로', '개인에서 집단으로','이야기에서 구조로' 역사가들의 임무를 전환할 것을 요구했음.

 

 

"사료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 에서 "사료+문제가 없으면 역사가 없다"로 한 단계 전진한 것임. 

 

 

문제? 그럼 역사학에서 문제라는 게 왜 중요할까? 왜냐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아내서 증명하는것, 그것을 통해 역사학이 과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음. (이 시기에는 특히 사회학이 미친듯이 영향력을 늘리고 있을때라 역사학도 과학이 되어야한다는 위기의식같은게 있었고, 결국 카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학이 더욱 사회학적으로 되는 동시에 또 그것과는 차별화를 도모하려는 몸부림.)

 

 

페브르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심성과 구조' 였고, 블로크가 주목한 것은 '비교사적 접근' 이었는데 이 개념들은 모두 후대의 역사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계속해서 주고 있음. 

-> 페브르: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라블레의 종교』

-> 블로크: 『봉건사회』,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 성격』

 

 

 

역사에서의 구조 개념. 본래 건축학 용어에서 따온 이 '구조'는 역사에서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을 의미함. 달리 말해 한계임. 아무리 날고 긴다하는 개인도 이 한계를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이건 일상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 쉽게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현실임.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아갈수있다는 것 같이.

 

 

2세대 아날학파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스승의 문제사를 계승하고, 구조의 힘에 더욱 주목해서 장기지속적 역사 개념을 만들어냄. 

존나 유명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브로델은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 세계』(1946) 에서 단순히 개인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 지리적 구조, 개인을 교차시키며 더 거대하고, 전체를 함께보는 역사서술을 시도함. 아울러 '장기 16세기'라는 개념과 시간지속의 다차원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사적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차원에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닌 제각기 다른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함.

 

 

이 새로운 시도에 당연히 역사학을 구조주의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따라왔음. 역사라는 학문은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인데, 구조를 내세워서 변하지 않는 것만 중요시하는 것은 결국 역사학이 아니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임.

 

 

변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극단적으로 추구되면 결국 이는 환원주의로 이어진다는 비판도 따라왔음. 역사학 그딴거 다 좆쓰레기 학문이고 인류의 역사는 전부 지리적 구조나 환경이라던지 뭐라던지 뭐라던지 결국 끝에 가서는 "전부 구조! 구조! 구조! 모든 것의 궁극적 구조! 인간은 병신! 원숭이! 인간의 행동, 개인의 생각 그딴건 다 필요없어! 중요한것은 저 하늘위에 떠있는 과학적 구조야!" 라는 결론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에 대해 브로델은 이렇게 말할 것임.

 

 

 

"구조는 시간의 마모를 버텨내며, 인간은 구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시간의 흐름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장기 지속적 구조, 개별적 사건,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주기 순환(conjoncture콩종튀르) , 이 세 가지 요소는 전체사의 이름 아래에서 다 함께 고려되어야하며, 아무리 장기지속적으로 보이는 구조도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지,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임.

 

 

장기 지속적 구조는 개별적 사건과 주기 순환에 영향을 주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장기 지속 구조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휘어짐.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사건이 구조를 창출해내는 경우도 있음. 사회 구조가 정치적인 것들에 앞설 때가 많다지만 그 반대로 정치적 힘이 사회를 변혁시키기도 하며, 아래에서부터 위로 결정되는 것도, 위에서 아래로의 결정도 같이 고려하여야만 한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고려할 수 있을까? 그리고 브로델의 역사학은 구조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에서 브로델은 산업사회 이전의 경제생활을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의 세 개 층위로 나누어서 15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진화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과정에서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강력해지고, 또 약해지곤 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경제적인 것 등등등등)들이 미친 영향을 고려함. 이 역사적 힘들은 결코 선험적으로 절대적 우선순위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서로 다른 세기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 힘들 사이의 관계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해내는게 바로 역사학자의 과제가 되겠음. 

 

 

다시 말해, 사회사가 아니고, 경제사가 아님. 사회를 포함한 역사이고, 경제를 포함한 역사가 되는 것임. 

 

 

이렇게 되면 결국 개념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설명이 가능함.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고 '역사적 자본주의'임.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개념일반은 모두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변형되고, 자라고, 그리고 썩어가고 있는 것들이며 그것을 변형시키는 주체는 때때로는 구조이기도, 그리고 때때로는 구조에 영향을 받는 보잘것없는 개개의 인간들의 결정이기도 한 것임.

 

 

구조와 인간은 따라서 길항拮抗관계에 있고, 역사에서 인간은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이자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구조는 거대한 사막이나 깊은 강물과 같은 것이라, 인간의 행렬은 이러한 자연물에 영향을 받아서 방향을 이리 저리 바꿀수밖에 없다는 것임.

 

 

 

우리는 가끔 역사 과정을 ‘행진하는 행렬’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물론 역사가들이 홀로 솟은 암벽 위에서 아래 경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나 사열대에 선 중요인물과 같은 위치에 자신을 놓고 생각한다는 위험성이 없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것은 당치도 않은 이야기 입니다. 역사가도 행렬의 한 구석에 끼어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인물에 불과합니다 -  E. H Carr/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서울, 탐구당, 1966)

 

 

그러니 두 발로 걸으며 나아가는 것은 분명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때, 변하지 않는 초시간적 구조만을 강조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역사라고 볼 수없고, 구조따윈 무시한 채 계속해서 변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것은 그림자뿐이 남지않는 무의미한 역사라 하겠음.

 

 

 

와그너, 던컨

 

한국 학계와 외국 학계의 일부 학자들(특히 와그너의 영향 아래 있는 학자들)이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이유도 결국 역사에서의 구조와 인간, 그리고 연속과 단절 중에서 어떤 부분에 더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음.

 

 

와그너, 던컨, 도이힐러 같은 학자들은 수십년전부터 한국사의 특수한 모습─오랜 기간동안 지속되는 왕조와 왕조를 가로지르는 지배집단의 연속성─같은 것들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토대로 연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여겼음.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 같은 경우는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가정본(嘉靖本)을 분석해서 성종~중종 연간의 문과 급제자들 중 70퍼센트, 현량과 합격자 28명 중 26명이 세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가지고 기존의 한국사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졌던 '15~16세기 훈구 사림 대립론'을 비판한 바 있고, 사화士禍도 훈구 사림 갈등에 의해 벌어진게 아니라 삼사(三司)의 영향력 강화로 정부 내 권력구조에 불균형이 초래돼서 그게 터지느라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음. 

 

 

존 던컨 교수 같은 경우는 저 위에서도 인용했듯이, 고려 후기 주요 가문 22개 중 3분지 2에 해당하는 16개 가문이 조선 초기에도 주요 가문이라는 점, 조선 초기 주요 38개 가문 가운데 8개 가문만이 새롭게 중앙 관원을 배출한 신생 가문이라는 점 등등, 중앙 가문 분석을 통해서 고려-조선 교체기의 지배 세력이 대부분 세력을 온존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음.

 

 

이에 반해 한국의 사학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거대한 행렬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외국 학자들에 비해 더 강할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발전적 변화들과 긍정적 모습에 더 집중했었음. (문벌귀족->권문세족->신진사대부->훈구->사림)조금 민족주의적인 틀에 갇혀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한국의 사학계는 뭣보다도 엄청난 양의 사료(특히 조선은 기록에 미친나라였기때문에 한국 사학자들은 죽어납니다) 엄정 해독이라는 역사학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작업을 성실히 수행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한국에 있다고 볼 수 있을것같음. 

 

 

한국 사학계가 고려-조선 왕조 교체와 여말선초 지배계층에 대하여 60년대 이후 어떤 통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와그너 류의 반론에 대하여 어떻게 재반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뭔가 지금 벌써 쓴 양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서 더 써보도록 하겠음,.

 

 

아, 근데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한국사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발전적 시각을 일정부분 해체하고 와그너, 던컨 류의 학설을 상당부분 수용하려는 흐름을 보여줬고, 이제는 거의 다수설, 정설이 된지 오래라고 함.(근데 교과서는 아무래도 반영이 느리다는 특성이 있다보니까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상당부분 여기에서 괴리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음...한국학자들 존나똑똑하고 병신들아닌데 슬픈일인듯) 암튼 다음 편에 본격적으로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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