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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아크르의 기적

1188, 파리의 어느 참사원은 업무를 보던 도중 갑작스러운 신경통을 앓기 시작했다. 심각한 통증으로 그는 글을 마저 쓰는 것조차 할 수 없었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으나,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넘어진 곳은 성 피아크르(Saint Fiacre)의 삶이 담긴 책자의 표지 위였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진심으로 성 피아크르에 대한 기도를 올렸고, 그 순간 그를 괴롭히던 고통은 사라졌다.

성 피아크르는 7세기의 아일랜드 출신 수사였으나 바다 건너 프랑스에 정착하여 엄청난 양의 토지를 하룻밤만에 전부 일궈버리는(그의 가래질에 수풀이 뿌리채 뽑히고 나무가 넘어졌다고 한다) 기적을 보여준뒤, 그 땅에 기도소를 세우고 수많은 가난한 이들과 어린아이들, 병자들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성인이었다. 많은 병자들이 그 기도소에서 나았고, 성인이 죽은 뒤에도 병자들이 회복되는 기적들이 계속 일어났다고 한다.

삽질의 달인 성 피아크르. 왼손에 삽을 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또한 정원사, 본초학자 그리고 치질의 수호성인이었다. 15세기 성 타우리노 교회의 석상.

 

 

성 베르나르의 기적

성 베르나르의 기적 치유는 대부분 길거리에서 발생했다. 병자들은 그의 기적 치유를 받기 위해 어디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때로는 군중에 낑겨서 제대로 기적 치유를 행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쾰른 주교관 창가에 서있던 성 베르나르를 보고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창 밖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오기도 했다. 사다리를 통한 거대한 군중들의 행렬은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곁에서 그 황당스러운 광경을 직관한 부주교 필리프(Philippe)

성 베르나르가 무사히 군중들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 이 날에 발생한 기적 중 가장 큰 기적

이라고 이야기 했다한다.

 

 

성 로베르 유해에 의한 기적

이 기적은 조금 그로테스크하다. 성유물, 그중에서도 성자의 유해인 성유골에 의한 기적인데, 이전에 지나가듯이 말했던 성 안트완의 기적(맥각병 치료 기적)과 같은 것이 바로 이런 성유골에 의한 기적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눈을 먼 것이 아니라, 얼굴에 종기가 잔뜩 나 있었기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성 로베르의 무덤을 찾아가 성합에 담긴 포도주로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앞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소녀는 종기들이 다 사라져 완벽하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니까 내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어렸을때 원인모를 피부병에 시달린적이 있었다. 그때 민간요법으로 가지를 잘라서 문질렀는데 그 이후에 싹 다 나았다. 그래서 난 지금도 가지볶음을 좋아한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기적아닐까?

 

 

기적으로도 안되는 것

 

그러나 중세인들 또한 기적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국왕이 아무리 성실하게 연주창 환자들을 손을 대서치료를 해도 개중에는 분명히 낫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중세인들 또한 알고 있었다. 연주창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가치료가 가능한 질병이기도 하였으니까, 현대적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기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확률상 얻어걸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중세인들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사가 일 년에 단 한 차례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휘젓고 나면,

처음으로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치료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도들이 모든 병자를 치료하지 않았더라도, 완쾌된 사람에 대해서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참 재미있는 논리네요.

 

그리고 또한 연주창과 같이 치료된 것처럼 보이기 용이한 질병들은 그렇다 쳐도, 중세인들에게도 기적으로도 절대로 치료되지 않을 것 같은 질병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중세인들은 눈이 먼 사람들은 기적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지만, 눈알이 빠지거나 아예 그 자체가 없는 사람들은 기적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인들은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치유할 수 있지만 뽑힌 눈은 되돌려주지 않는다.

기능이 불완전한 것은 완전하게 할 수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갑자기 생긴 궁금한 점: 탈모는 그럼 기적으로 치유할 수 있었을까?

 

 

 

참고: 이정민. (2016). 10-13세기 프랑스 수도승들의 질병 치료와 기적 치유. 서양중세사연구, 38, 23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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