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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류승 14인을 모아 밤에 도지 정근을 베풀다

도류승(道流僧) 14인을 모아서 밤에 도지정근(桃枝精勤)을 베풀었는데, 임금은 깊이 근심하므로, 정신이 흐리었고, 역마를 탄 자가 연락하여 그치지 아니하였다.

세종 2년 6월 11일 

 

 

  이번에는 지난번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완전 멋있고 대단한 도류승들에 대해서 써보도록 하겠음. 전적으로 이 논문[각주:1]에 의존했고 중간중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참고했음. 

 

 

  도류승(道流僧). 이 사람들 말이 스님이지 그냥 원래 앞이 안보이는 맹인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혀놓은 뒤에 선사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유사승려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주로 매복업 독경업을 했는데 매복업은 뭐 점치는 일 같고, 독경업은 주로 불교나 도교의 경전같은 것을 외는 것인데 가장 자주 독경되었던 게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이었음. 저 위에 내가 브금으로 깔아둔 음악이 옥추경을 읊는 소리다.

 

『옥추경』은 병굿이나 신굿 같은 큰 굿에서만 읽는데, 이 경을 읽으면 천리귀신이 다 움직인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옥추경(玉樞經))]

 

 

영화 사도 中. 도류승들의 조상해원경 독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들은 13세기 말 고려시대 때부터 명통시(明通寺)에 소속돼서 국가에 변란이라던지 전염병이라던지 크게 흉한일이 있거나 할때 긴급소집되고는 했음. 조선시대에도 가뭄이 들거나 그런 재난이 들때 이 도류승들을 잘 활용했는데, 아무래도 유교국가다보니까 일부 관료들은 도류승들한테 품계를 주는 일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보내기도 했음. 그런데 뭐, 이 사람들은 음악계열이나 이런 스피리츄얼한 계통으로 팔자 피지않는이상 터프한 전근대시대의 현실에서는 앞을 못보는 사회적 약자다 보니까 조선전기에는 막 기를 쓰고 반대하진 않았던 거지.

 

  도류승들은 그래도 사회적 위치가 앵간 돼서 고관대작들도 그들에게 ‘해라’는 못하고 중인 대접을 하여 ‘하게’를 했다고 함. 글고 국왕이 궁궐을 나설 때와 돌아올 때에도 이 사람들이 도포를 입고 떼지어 성 밖에 나와 조정관원들과 함께 임금을 보내고 맞는 일도 했으니 뭔가 간지나는 역할로 보임. 약간 조선시대 주술사나 소서러같은 느낌임. [각주:2]

 

 

 

임금이 밤에 대비를 모시고 몰래 이궁 남교 풀밭에 행차하다

한성부에서 널리 구하여, 검교 판관(檢校判官) 정줄(鄭茁)과 중·속인 수십인을 얻어 풍양으로 보내니, 3, 4인만 가려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밤에 대비를 모시고 몰래 이궁 남교(南郊) 2리쯤 되는 풀밭에 행차하여 자리를 잡으니, 두 대군과 청평(淸平)·평양(平壤) 두 공주도 또한 따르고, 그 나머지 따르는 자는 남녀 합하여 불과 40인이었다. 정줄과 도류승(道流僧) 을유(乙乳) 등이 앞을 인도하여 행하였다. 

 

 

 

  근데 진짜 주술사가 맞는게 부적도 만들고 주술도 썼음. 조선은 민간신앙이나 불교나 이단이라고 개 극혐을해서 완전히 작살을 내놓기는 하지만 동시에 가뭄이 든다던지 먼가 분위기가 흉흉하고 전염병이 돌고 그런 문제가 생기면 불가의 의식이고 도가의 의식이고 활용할수있는건 싸그리 싹다 활용해서 쓰는게 약간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이단이든 이교든 뭐 최선이라도 다해야하는게 당연한거아님?"(실제로 문종이 한말) 같은 마인드라서 그런거같음. 약간 평상시에는 죽어라 싸우다가 온 나라사람들 다죽는 위기상황에는 "죽이는건 다음으로 미뤄두지, 이번만은 임시동맹이다" 느낌인건가.

 

"성리학, 난 아직 네 놈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유교+도교, 최강콤비 탄생하다...!

 

 

뭐 도교 말고도 불교 의식인 수륙재도 쿨돌때마다 주기적으로 써줬고 양반들이고 왕실이고 잘만 길흉화복, 자식 남자일지 여자일지 점치려 다녔고 왕실이 불가에 깊이 귀의했었던 역사적 사실들은 말하기도 입아플 지경. 단지 이것들을 공식적으로 좀 인정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뭔가 갈등이 많았지만 도류승들은 예외로 나라에서 공식인정해서 공무원으로 특채하기까지했음

 

앞서 말했듯 이들이 시각장애인들이었기때문이었음. 유학자들의 나라는 앞이 안보이는 환과고독의 사람들을 보살펴야할 의무가 있었던거지. 그래서 이들은 무려 소격서 관원(공무원)으로 정식 채용되어서 열심히 일했음. 도류승말고도 음악계통으로 많이 직업을 삼기도 함. 고대 유교경전에서도 하은주 시대에 맹인들이 시를 읊어서 바른일을 말하고 북을 쳐서 일식과 월식을 막게 하였다고 하기 때문에 조선도 이런 전례를 따른 것임. 

 

조광조가 그렇게 이단이라고 폐지시켜버려야한다고 했었던 그 소격서. 왕들은 조종 이래로 지켜져 내려온 제도인데 이걸 없앨 수가 있느냐 했었는데,,,사실 이런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도 했던거지. 소격서 폐지되면 이 맹인들은 당장 어디서 어떻게 먹고살겠음? 다 실업자 돼버리는데. 복지차원에서라도 필요성이 있었던거지. 근데 결국 나중에 폐지돼버린다음에 도류승들은 공무원직 내놓고 민간기업으로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ㅠㅠ 

 

 

암튼 이 도류승들은 앞이 안보이는데다가 귀신들도 다룰수있는 마나 보유자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궐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있을 수 있었음. 약간 환관 비스무리한 느낌이었던거같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질병=귀신이었기때문에(둘다 눈에는 안보이지만 사람한테 피해를 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누구 누구 어르신 병걸렸다더라 하면 이 사람들이 파견돼서 에너지 치료하고 독경 외워서 귀신 물리치고 그런.

 

 

 

 

 

 

“다른 집안의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맹인과 무녀만 한 자가 없습니다. 상께서 미녀를 구하신다면 마땅히 이들에게 물어보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곧 악소(惡小)에게 명하여 맹인과 무녀를 닦달케 하였다

고려사 권36, 충혜왕 후 4년 8 월

(집안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도류승들)

 

 

 

 

 

 

내시 양선(梁善)과 대수장(大守莊) 등이 고하기를, “경창궁주(慶昌宮主)가 그 아들 순안공(順安公) 종(琮)과 함께 맹인 중[盲僧] 종동(終同)을 시켜 주상(主上)을 저주하고, 종(琮)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이 되게 하려 합니다.” 하니, 왕이 이습ㆍ인공수ㆍ이지저(李之氐)ㆍ인후ㆍ장순룡에게 명하여 종동을 국문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9, 충렬왕3년(1277) 7월

(임금을 저주하는데 고용된 맹승)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권력싸움에도 휘말려서 피보는 경우가 많았다. 부적이나 명리술 사주팔자 독경술 같은 스킬을 보유한 사람들이다 보니까 약간 능력자 배틀물에 나오는 것처럼 도류승들끼리도 파가 갈려서 서로 에너지배틀 벌이고 그랬을수도 있지 않을까?

 

 

  뭔가 고려시대 기록만가지고 잔뜩 말햇는데 조선시대때에는 도류승 관련 기록이 특히 많이 나타나는 때가 바로 세종의 치세였다고 함. (전 글 보면알겠지만 확실히 둔갑술도 쓰고 도지정근 의식도 하고 도류승들이 바빴던것같다) 아마 세종대왕이 장애인들을 포함해서 힘든 백성들을 구휼하는 복지정책을 많이 시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실제로 세종은 도류승들의 주술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을 후하게 내리는 것을 실록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앞이 안보이는 사람들을 특별히 더 보살펴주기도함.

 

 

 

 

 

전(前) 지순안현사(知順安縣事) 박전(朴甸)이 민폐를 구제하는 상소 48조를 올린 것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여러 조(曹)와 같이 논의하여 가히 시행할 만한 조건을 채택하여 아뢰니, (중략)1. 토지의 세금과 노비(奴婢)의 공물(貢物)은 모두 1년에 한 번씩 거두고 있는데, 다만 경사(經師)(경 읽는 사람) 와 무격(巫覡)(여자 무당과 남자 무당)의 공물은 1년에 두 번씩 거두고, 남녀의 맹인 무당도 또한 모두 세납을 거두니, 진실로 불쌍합니다. 원컨대, 경사와 무격은 1년에 한 번만 받아들이게 하도록 하고, 맹인 무당의 세는 전부 면제하도록 할 것이며, ... (중략)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5년 12월 20일

 

 

 

 

 

 

맹인 26인이 국상 때문에 음악을 금지하여 생계가 어려움을 상언하다

맹인(盲人) 박연(朴連) 등 26인이 상언(上言)하기를, 

"병인들이 각기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으로 직업을 삼아 생계를 이어 왔었는데, 근래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음악을 정지하였으니,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각기 쌀 한 섬씩을 주라고 명하였다.

세종 6년 7월 22일

 

 

 

 

 

 

 

세종대왕님은 성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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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순 (2015) 도류승道流僧의 정체성과 독경활동 : 무경(巫經)으로 전용되는 경전들, 한국전통문화연구 [본문으로]
  2.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80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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