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
明明魯侯
밝디 밝은 노나라 임금님
克明其德
그 덕을 밝게 하고
旣作泮宮
반궁을 지으시니
淮夷攸服
회수의 야인들이 복종하고
矯矯虎臣
날랜 범과 같은 신하들
在泮獻馘(재반헌괵)
반궁에서 적의 귀를 바친다
-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 -
세종 장헌대왕께옵서 연못 같은 침묵과 우레 같은 소리로, 양(陽)으로 열리고 음(陰)으로 닫히어, 천과(天戈)를 휘둘러 귀를 베이매[折馘]유관(楡關)의 오랑캐는 전전(傳箭)의 신호가 끊어지고, 월첩(月捷)을 날리어 넋을 놀라게 하매 부상(扶桑)의 되놈이 늦게나마 식심(食椹)을 뉘우쳤으니, 일노(一怒)로 승리를 거두어, 30년이 태평하였습니다.
世宗莊憲大王。淵默雷聲。陽闢陰闔。揮天戈而折馘。楡虜絶傳箭之音。飛月捷以禠魄。桑夷悔食椹之晚。一怒制勝。三紀昇平。
동문선 44권 / 表箋 進武定寶鑑箋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 참조)
여러분들은 혹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코를 베어 갔다는 사실을 들어보셨나요?
꽤나 유명한 이야기니까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겁니다.
그런데 조선군도 전투를 통해 죽인 여진족 시체의 귀를 자른다음,
김치처럼 염장절임해서 킵해두었다가 종묘에 고하며 왕실조상님들에게 자랑하는게 국룰이었다는 놀라운 사실! 이것도 혹시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귀를 잘라 바치고 (헌괵獻馘), 만방에 고하는 (노포露布), 잔혹한 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헌괵(獻馘)이란? 노포(露布)란?
드릴 헌(獻)
벨 괵(馘)
드러낼 노(露)
퍼뜨릴 포(布)
헌괵(獻馘)은 전쟁 후에 적의 수급이나 왼쪽 귀를 잘라서 왕에게 바치고, 이후 왕이 종묘에 고하는 의식입니다.
적의 머리나 귀를 자르는 관행은 조선조 내내 일관적으로 행해졌던 아주 오랜 관행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너무 잔인해서인지, 아니면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코베기가 너무 인상깊어서 상대적으로 그 잔인성에 묻혀버린건지는 몰겠지만 조금 세상사람들 관심 밖의 의식이 되어버렸는데요,
오례인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중에서 군례(軍禮)에 속하는 이 의식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의 선노포의(宣露布儀: 노포를 알리는 의식) 파트에서 처음 헌괵의(獻馘儀)라는 이름으로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모습을 드러냅니다.
헌괵 절차는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전쟁이 끝난 뒤, 지휘관은 휘하의 장수들로부터 사로잡은 적의 숫자, 베어낸 적의 머리의 숫자, 귀의 숫자 등을 정리한 뒤에 조정에 보고하고,
조전 절제사 이징석은 생포한 장정 남자 18명, 장정 여자 26명, 남녀 아동 각 12, 사살하여 귀를 벤 것 5, 갑옷 2, 각궁 15, 화살통 7, 환도 1, 화살 3백 30, 창 2, 말 25필, 소 33두, 안자(鞍子) 3이며...
- 세종 15년 5월 7일
2. 머리와 귀를 조정으로 올려 보낸 뒤,
3. 조정에서는 이에 맞춰서 노포露布(간단히 말하자면 전승문: 이러이렇게 우리가 멋지게 이겻습니다!!! 같은 글을 말함)를 짓고,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역적을 격파한 노포(露布)에,
“삼가 아룁니다. 큰 교화로 중생을 훈도하여도 효경(梟獍)과 같은 습성은 변화시킬 수 없고, 하늘이 인자함으로 만물을 길러도 서리와 눈의 위세는 없앨 수 없습니다. (중략) 이에 임금께서 근심하는 때를 당하여 ‘그대가 가서 정벌하라.’라는 명을 외람되이 받들었습니다. 아침에 한수(漢水)를 건너니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더해졌고, 저녁에 수원(水原)으로 나아가니 적의 간담이 이미 서늘해졌습니다. 승리의 바람이 큰 깃발에 불어오니 안성(安城)에 개미 떼처럼 모여 있던 적군이 먼저 무너졌고, 요란한 우레가 신령한 칼끝에 몰아치니 사마귀가 수레에 맞서듯이 죽산(竹山)에서 저항하던 무리가 저절로 꺾였습니다. 끓는 솥 속에 노는 물고기나 바람에 날리는 장막 위에 둥지를 튼 제비와 같은 적도의 넋이 순서대로 처형되었으며, 까마귀처럼 모였다가 쥐새끼처럼 달아나는 무리들이 차례대로 사로잡혔습니다. 요악한 기운이 사라지자 절도사의 옛 진영이 무탈해졌고, 산하(山河)가 바뀌지 않았으니 백성의 생활이 예전과 같아졌습니다. (중략) 단지 경축하고 기뻐하는 마음만 간절하여 삼가 노포를 받들어 아룁니다.”
(대충 노포에는 이런글이 쓰여있었다.)
4. 왕이 직접 적괴들의 머리나 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뒤 고묘告廟. (종묘에 알림)
도순무사 오명항이 적괴 3인의 수급함(首級函)을 직접 받들어 단 아래에서 꿇어앉아 올렸다.
판의금부사 김흥경(金興慶)이 받아서 단 위에 진열하였다.
겸령병조사가 올라와서 복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쪽이 위인가? 동쪽이 이웅보(李熊輔)인가?”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동쪽은 이웅보이고, 가운데는 나숭곤(羅崇坤)이며, 서쪽은 정희량(鄭希亮)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역적의 수급은 시일이 오래되 부패하여 모두 형체가 없습니다. 정희량의 수급은 형체가 약간 남아 있으나 두발이 모두 빠져 장대에 매달 수 없으니 촘촘한 그물에 싸서 매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선전관은 내려가서 수급을 매달고 도순무사는 그대로 입시하도록 분부하라.”
엇?? 헌괵의 안에 노포가 들어가는 건가요?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선노포의 안에 헌괵의가 들어가든, 헌괵의 안에 노포가 들어가든, 그게 그거라서 중요한게 아닙니다. 헌괵-노포는 세트여서 항상 같이 가는 거였거든요.
사실 중국사를 보면 꼭 항상 같이 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는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예조가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은 ‘헌괵할 때에 반드시 노포가 있는 것이지만...)
그치만 사실 제대로 매뉴얼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조선초부터 헌괵은 계속 시행되어 왔습니다.
豐海道都觀察使宋文中捕倭船一隻獻馘, 遣大將軍金漸, 賜宮醞綺絹。
풍해도 도관찰사 송문중(宋文中)이 왜선 1척을 잡아서 수급(首級)을 바치니(헌괵 하니), 대장군 김점(金漸)을 보내어 궁온(宮醞)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태조 5년 2월
헌괵은 태조실록에서부터 나오고요,
閏德以李順蒙不獻馘不待令先行、崔海山不及軍期、李澄石亦不待令先行劾之。
윤덕이 이순몽의 헌괵(獻馘)치 아니하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간것과, 최해산의 군사가 모이는 기한에 미치지 못한 것과, 이징석도 영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간 일들을 탄핵하였다.
- 세종 15년 5월
제대로 안하면 탄핵될 수 있다고 세종실록에서도 언급되고요,
가장 확실하게는 세종 15년 5월 11일 자 실록 기록을 보면 명확하게 '헌괵의'라는 언급만 안되어있을뿐, 후대의 헌괵의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의식을 행하였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조에서 인민들에게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킨 뜻을 알게 할 것을 아뢰다
"삼가 고찰하건대, 수 문제(隋文帝) 개황(開皇) 연간에 진(陳)을 평정한 원수(元帥) 진왕(晉王)이 역마(驛馬)로 노포(露布)를 올리니, 백관과 사방의 사객(使客)들을 모아서 노포를 선포하고, 그것이 끝난 다음 한바탕 춤을 추고 파하였으며, 대당(大唐)에서는 적을 평정할 때마다 첩서(捷書)를 태묘(太廟)에 올리고, 인해 문무 군신을 모아 노포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파저강 야인들이 몰래 북변(北邊)에 들어와서 인민을 살략(殺掠)하므로, 할 수 없이 장수를 보내서 토벌하여 부락을 소탕하고, 죽이고 잡음이 심히 많으며, 군사가 온전히 돌아왔으니, 주 선왕(周宣王)의 6월의 군사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합니다. 원컨대 옛 제도에 의하여 종묘에 고하고, 즉일에 중외에 포고하여 국내의 인민들로 하여금 농삿달에 군사를 일으킨 뜻을 확실히 알게 하고, 인하여 중외로 하여금 하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謹按隋 文帝 開皇中, 平陳元帥晋王以馹上露布, 集百官四方客使等, 宣露布訖, 蹈舞而罷, 大唐每平寇賊, 獻捷於太廟, 仍集文武群官宣露布。 今婆猪江 野人等潛入北鄙, 殺掠人民, 勢不獲已, 命將致討, 掃蕩部落, 殺獲甚衆, 全師而還, 可無愧於宣王六月之師。 乞依古制告廟, 卽日布告中外, 使境內人民, 曉然知農月興師之意, 仍令中外稱賀。" 從之。
但邊功必須獻馘於朝廷, 然後方擧懋賞之典, 乃恒古之道。 近來事多苟且, 獻馘之規廢, 邊將以言語奏功, 朝廷亦只據其口而論賞, 人不以爲怪。 今此大捷, 亦未嘗獻級。 雖必無他虞, 而事理不當如此。
그러나 변방의 공(邊功)은 반드시 조정에 헌괵(獻馘) 한 뒤에야 비로소 성대한 상전(賞典)을 거행하는 것이 항고(恒古)의 도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일에 구차함이 많아 헌괵의 규칙이 폐해져서 변장(邊將)들도 말로써 주공(奏功)하고 조정에서도 그 말에만 따라 논상(論賞)하는 것을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번 대첩에도 헌급(獻級)을 하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다른 염려는 없겠으나 사리에는 부당하다.
- 선조 26년 7월
선조실록에서도 보면 원칙상으로는 수급을 헌급하는 게 옛날부터의 국룰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命賊魁希亮、熊輔、崇坤首級, 沈鹽藏置于光熙門內訓局火藥庫中, 待都巡撫使回還後, 行獻馘之禮。
적괴(賊魁)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나숭곤(羅崇坤)의 수급(首級)을 소금에 담가 광희문(光熙門) 안의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화약고(火藥庫) 안에 간직해 두고 도순무사(都巡撫使)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괵(馘)을 바치는 예전(禮典)을 행하도록 하였다.
-영조 4년 4월 13일
당연히 멀리서 운반하면 오는 와중에 상할테니까 소금에 절이는 모습도 영조실록을 보면 확인할 수 있네요.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헌괵 사례들이 실록에 주구장창 나옵니다.
성종때도 세조시절의 이시애의 난을 회고하며,
"과연 큰 승리(勝利)를 얻어 왕정(王庭)에 적의 머리를 바치고(果得大捷, 獻馘王庭)" 라는 표현을 쓰기도했고,
중종때도,
전교하기를,
"대저 변방의 장수가 헌괵(獻馘)하는 것은 예사이다. 그러나 근일 남방의 장수들이 왜인을 추포하였을 때 헌괵한 것은, 반드시 생포하려 하지만 결국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기록이 있어요.
사실 헌괵은 조선에서만 시행된 것은 아니었고,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국룰이었는데요,
제가 맨 윗부분에 인용한 시경詩經의 반수泮水편에도 在泮獻馘(재반헌괵: 반궁에서 적의 귀를 바친다)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조선 사람들도 헌괵의 시행 근거를 여기에서 끌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궁금한점! 왜 왼쪽 귀인가요?
일단 한사람한테 귀는 두개가 달려있기때문에, 양쪽 귀를 다 자를 수 있다고 하면 전공이 두배로 뻥튀기가 되겠죠? 그러니까 한쪽 귀를 정해야하는거에요.
정랑(正郞) 유자광(柳子光)이 건주위(建州衛)에서 와서 괵(馘)을 바쳤는데, 오른쪽 귀가 거의 절반(居半)이었다.
正郞柳子光, 自建州衛來獻馘, 右耳居半
- 세조 13년 10월 11일
이렇게 되면 진짜 난리나잖아요. 절반이 가라라는건데,,, 그나저나 유자광이네요ㅋㅋㅋㅋㅋㅋㅋ
앗 그건알겠는데,,,그니까 왜 굳이 왼쪽! 이어야하나요? 오른쪽 귀로 정할 수도있지않나요??
그건 아마 고대 중국의 종교적인 그런 관습과 관련있는 것 같아요. 제가 예전에 썼던글
마지막 부분에도 인용했던 예기집설대전을 보면,
盟之爲法 先鑿地爲方坎, 殺牲於坎上 割牲左耳 盛以珠盤, 又取血 盛以玉敦 用血爲盟,
맹(盟)을 맺기 위해서는, 땅을 사각형으로 잘 파서, 구덩이 속에서 제물(희생양)을 죽이고, 제물의 왼쪽 귀를 잘라서 진주 쟁반에 담고, 그 피를 뽑아 옥 그릇을 채우고, 맹세의 글을 쓰면 된다.
이런 내용이 쓰여 있는데요. 여기서도 동맺 맺기 위한 의식을 치르면서 제물의 왼쪽 귀를 자릅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왼쪽을 좋아했나봐요.
+) 조선판 귀무덤?
근데 저 실록 뒤져보다가 재밌는 기록을 발견했는데요.
흠, 그래도 조선은 일본군처럼 코무덤, 귀무덤 같은건 안만들었네?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이런걸 읽게 되었습니다.
중종 5년 4월 25일(1510년)
적의 시체 무덤이 왜인에게 경계가 되기에 계속 수급을 올려 보내게 하다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수급(首級)을 바치는 것이 막 오고 있으니, 역로(驛路)에 폐가 있겠다. 선전관을 보내어 조사하여 곧 소재처에서 묵게 하고 이후로 벤 것은 그 수효만 써서 아뢰고 올려 보내지는 말게 하라."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시체를 쌓아 경관(京觀)을 만든다 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참획(斬獲)한 것을 묻어 그 무덤을 높고 크게 하여, 뒤에 오는 왜인으로 하여금 보고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하고 또 성종조(成宗朝)의 예에 의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수급을 점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傳于政院曰: "獻馘方來, 驛路有弊, 宜遣宣傳官驗之, 卽所在處埋之。 今後斬獲, 但書啓其數, 勿令上送。" 政院啓曰: "古云: ‘積屍爲京觀。’ 今亦埋置斬獲, 高大其墳, 使後來倭人, 見而知懼, 又依成宗朝例, 遣史官點撿首級。" 上從之。
조선도 귀무덤이나 코무덤은 아니지만 비슷한 무덤은 만들었네요. 근데 일본 귀무덤은 명목상으로나마 혼령을 위로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어케보면 목적마저 고인능욕+본보기 용도의 시체토템인 조선의 시체무덤이 더 잔인하다 할수있는거 아닌가?
아님말고
(사실 일본군은 눈뜨고 살아있는 민간인들 코베어간거고 조선군은 왜구 시체로 무덤만든거니까 다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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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에 누가 댓글에서 적 목 들고 오면 개별포상 있나요?? 하고 물어봤던거 같은데 찾아봤음. 근데 이사람은 지멋대로 여진족 거의 살해해버린 거라 조정에서도 상을 줘야하나, 징계를 줘야하나 논쟁.
창성의 별시위 강효복 등이 정탐하다 적과 싸워 머리를 베어 온 일을 논의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오순(吳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창성(昌城)에 수자리 사는 별시위(別侍衛) 강효복(姜孝福) 등 30인이 강(江)을 건너 순행하여 정탐하다가 홀연히 적(賊) 20인을 만나 그들과 서로 싸웠는데, 〈적의〉 머리 2급(級)을 베고 말[馬] 2필(匹)과 궁전(弓箭)341) 을 빼앗아 돌아왔으므로, 이에 강효복을 보내어 적의 머리를 바칩니다."
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병조(兵曹)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심회(沈澮)·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변장(邊將)이 수급[馘]을 바치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는 것이 이미 전의 법규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얼음이 풀리고 물이 불어서 반드시 칭병(稱兵)하여 입구(入寇)할 수는 없겠으나, 좀도둑에 이르러서는 없는 때가 없으니, 마땅히 절도사(節度使)에게 하유(下諭)하여 더욱 방비[隄備]를 엄하게 하소서."
邊將獻馘, 論功行賞, 已有前規, 然今氷解水漲, 必不得稱兵入寇, 至於鼠竊, 無時無之, 宜下諭節度使, 益嚴隄備。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강효복 등이 비록 얻은 것이 크지는 않더라도 머리를 베고 말을 빼앗았으니, 모름지기 속히 공(功)을 상주어서 뒷사람을 권면하게 하소서"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30인이 떼를 지어 순행하여 정탐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위험한 방법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강효복 등이〈머리를〉 베어 얻은 것이 있었으면서 손상(損傷)을 입은 것은 없었으니, 또한 가상(嘉尙)합니다."
하고, 이철견(李鐵堅)은 의논하기를,
"요사이 강변(江邊)의 군사(軍士)가 공(功)을 자랑하려고 하여 적(賊)을 공격한 것을 실제로써 고(告)하지 않는 것이 많으니, 강효복 등의 체탐 절차(體探節次)를 다시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적(賊)이 우리 지경(地境)에 이르렀기에 부득이 더불어 싸우는 것은 가합니다만, 군사를 일으켜서 강(江)을 건너 적(賊)을 쫓아 참획(斬獲)하였으니, 얻는 것이 더욱 많으면 원망하는 것이 더욱 깊어질 것인데, 변방(邊方)의 근심이 어느 때에 그치겠습니까? 떼를 지어 깊이 들어갔다가 요행히 승리한 것이니 이것을 자주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한치형(韓致亨)은 의논하기를,
"척후(斥候)로 인하여 깊이 들어가 더불어 싸웠으니, 바로 이것은 위험한 방법입니다. 비록 몇 급(級)을 얻었더라도 공(功)을 상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신준(申浚)은 의논하기를,
"초목이 무성하면 저들이 늘 와서 사냥합니다. 만약 저들이 배를 만들어 입구(入寇)하려고 하는데 강효복 등이 매복처(埋伏處)를 잘 설치하여 참획(斬獲)하였으면 기공(奇功)이라 이를 만하나, 이는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변방(邊方) 사람이 공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여 일을 낸 것이니 갑자기 논상(論賞)할 수는 없습니다. 도원수(都元帥)로 하여금 상세히 묻게 해서 다시 아뢴 뒤에 이를 상주게 하소서."
하고, 박건(朴楗)은 의논하기를,
"척후(斥候)를 보내는 것은 먼저 적변(賊變)을 알고 미리 군병(軍兵)을 정비해서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강효복의 말과 같이 아무리 입구(入寇)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 지경(地境)을 범하지 아니하였는데, 문득 공격하여 죽였으므로 더욱 변방의 흔단(釁端)을 열어 놓은 것이니, 아마도 불가할 듯합니다."
하고, 김수손(金首孫)은 의논하기를,
"강효복 등은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서 적(賊)의 다소(多少)도 알지 못하고 아우러져 서로 싸웠으니 그 형세가 매우 위험하였는데, 승리를 얻은 것은 요행스런 일입니다. 또 저들이 우리를 범하지 아니했는데 우리가 들어가 공격하였으니, 그 잘못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상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이 사람을 죄주어서 위험스러운 것을 이용하여 요행을 구하는 무리들을 징계(懲戒)하게 하면, 변방의 흔단(釁端)이 근절될 것입니다."
하였다.
->헌괵 고인물 고언백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 27일 계축 6번째기사
고언백(高彦伯)에게 가의(嘉義)를 가자(加資)하였다. 【언백(彦伯)은 교동(喬桐)의 향리(鄕吏)였다. 궁마(弓馬)를 잘 다루었는데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분격(奮擊)하였다. 공(功)으로써 양주 목사 겸 경기 방어사(楊州牧使兼京畿防禦使)가 되었는데, 진(陣)을 쳐 대전(對戰)한 적은 없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적으로 하여금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또 적의 형세를 잘 염탐하여 혹 야경(夜驚)도 하고 혹은 숲속에서 저격하였는데 자신이 사졸(士卒)들보다 앞서서 싸웠으며 그가 쏜 화살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전후하여 헌괵(獻馘)한 것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으므로 적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
참고문헌
송지원 (2010) 영조대 儀禮 정비와 『國朝續五禮儀』 편찬, 한국문화
정다함 (2013). 征伐이라는 戰爭/征伐이라는 祭祀. 한국사학보
신진혜 (2015) 英祖代 凱旋 儀禮의 整備와 그 意義 -『國朝續五禮儀』 宣露布 ㆍ獻 儀 禮를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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