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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던 석유왕 록펠러의 가문.

 

 

 

 

 

 

록펠러가 일군 스탠다드 오일은 결국 반독점법 쳐맞고 오체분시되어버리지만,

 


록펠러 가문은 여전히 미국 내 여러 분야에 손을 뻗치며 20세기 내내 영향력을 유지해왔음.

 

 

넬슨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할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석유왕이었다

 

대표적으로 석유왕의 손자인 넬슨 올드리치 록펠러는 1959년부터 1973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14년에 걸쳐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닉슨 사임 이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에 지명되어 사망하기 2년전인 1977년까지 미합중국 제41대 부통령 직을 역임했던 바 있음.

 

 

 

 

 

 

 

 

 

 

이 고명한 정치인 넬슨 록펠러에게는 마이클 록펠러라는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마이클은 학창시절엔 레슬링 선수를 할 정도로 활동적이었으며 하버드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엿음.

 

 

 

 

 

역사와 인류학을 전공했던 마이클은 인류 역사상 아직 밝혀지지않은 미지의 세계로 탐험하겠다는 원대한 모험심을 가슴속에 품고잇엇는데,

 

 

 

 

 

그 미지의 세계는 바로 네덜란드 식민당국에 의해 오랫동안 출입금지 지역이었던 뉴기니 남서부 지역이었음.

 

 

 

 

네덜란드 놈들은 당초에 이 지역이 언젠가 ‘상품작물’들을 잔뜩 심을 잠재적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출입을 금지하였던 것인데,

 

 

 

그 땅에 함께살던 뭔가 무시무시한 사람들도 같이 자연스레 보존돼버렸던거

 

 

 

이 사람들은 아스맛(Asmat)이라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쁜 목공예 기술과,

 

 

 

 

 

조상 대대로 원수를 진 대상의 머리를 자르고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식인종이었음…

 

 

 

 

 

 

이 사람들은 사람의 머리가 식물로 치면 열매에 해당한다고 믿어서,

 


전투가 끝나면 패배자들의 머리를 열매따듯 똑 따서 불에 그슬린 뒤 피부껍질을 긁어서 친족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케이크처럼 쉽게 먹었음

 

 

 

 

 

 

 

재벌집 막내아들 마이클은 끓어오르는 모험심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대의 일원이 되었음.



탐험을 하며 마이클은 이 식인 부족들의 아름다운 목공예에 매료되었고,

 



 그에 대한 편지를 가족들에게 여러차례 보내기도 하는 등, 

 

 

성실하고 성공적으로 탐험대의 일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음.

 


그러던 1961년 11월 17일

 


 연안에서 마이클 록펠러와 네덜란드 인류학자 르네 바씽을 태운 인류학 탐험대의 **카누가 전복되어버리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르네 바씽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이대로라면 드넓은 망망대해에 표류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어쩌면 나,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하며 해안선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음.

 

 

아들의 실종에 대해서 기자회견 중인 넬슨 록펠러 당시 뉴욕 주지사.

 

 

자기네 나라 재벌집 막내아들+서울시장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외진 곳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에 

 

 

당연히 미국은 발칵 뒤집혔고 곧 엄청난 규모의 수색팀이 꾸려졌는데,

 

 

수색 과정에서 여전히 바다에서 카누에 매달려있던 네덜란드인 르네 바씽은 가까스로 구해졋지만,

 



해안까지 헤엄쳐갔다는 마이클 록펠러의 흔적은 바다 위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음.

 



와중에 네덜란드의 어느 관리는 거기 원주민들이 좀 미개하긴 하지만 친절(?)하기 때문에 해안까지만 잘 헤엄쳤다면 살 수 있을 거란 얘기를 했지만,

 


당시 대중들의 분위기는 역시 익사했을 거라면서 회의적이었음.

 


결국 수색팀은 2주뒤에 철수했고,

 



마이클 록펠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종상태임.

 


마이클은 살해당했다?

 



그런데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마이클이 실종된 지역의 해안지역에서 살던 원주민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자들이 생겨났음.

 


그들은 입을 모아 특정 원주민 부족이 그를 죽였다고 증언하며 

 


구체적으로 마이클의 팬티모양이나 넓적다리는 어느 집이 가져갔는지 등등 전리품 분배를 상세히 설명했음

 


총 15명의 원주민들이 마이클의 시체를 나누어 가져갔으며 그 중 일부는 낚싯바늘로 사용되었다는 등… 

 


마이클이 원주민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는 경악할만한 증언이었지만 

 


당시 1960년대 뉴기니 독립분위기라는 정치적 혼란상에 더해 증언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진상규명은 흐지부지되었음.

 


아스맛 사람들에게 외적인 백인들을 속여서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종교적 미덕으로 장려되었으며 ,

 

 

다들 “그랬다 카더라” 수준의 증언만했지 누구 하나라도 “내가 죽였소”하고 자백하는 자는 없었기 때문임.

 



(근데 죽였다고 자백하면 큰일날 수 있다는걸 원주민들도 알았을텐데 당연한거 아님? 진짜 모름)

 


아무튼 그렇게 미제사건이 되었고 서서히 역사 속으로 묻히는 와중이었던 8년 뒤.

 


사고현장 근처에서 어떤 영상이 하나 찍혔음.

 

 

 

 

그 영상에는 식인종들 사이로 누가보더라도 한눈에 백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벌거벗은 사람이 함께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음…

 

 

 

마이클 록펠러, 과연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측한대로 해안선까지 수영하던 도중 힘이 부쳐서 익사했을까?

 

 

 

 

 

아니면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디디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곧바로 잡아먹혔을까?

혹은 재벌집 막내아들로서의 삶을 버리고 부족의 일원이 되었던 것일까?

진실은 지금도 여전히 미궁속에 있다

 

 

 

 

 

 

 

여담으로 훗날 그의 아버지인 넬슨 록펠러(석유왕 손자이자 미국 부통령)는 1979년 45세 연하의 비서와 함께 무언가를 하던 도중에 심장이 멈춰서 죽음.

 

 

 

당시 그의 비서였던 매건 마샥.

 

 

 

(넬슨 록펠러의 유언장에는 그녀에게 빌려준 45,000달러를 그냥 증여하라고 쓰여있었다 한다.)

 

 

 

 

 

 

 

흐흐흐 유튜브에 올릴 글이니까 상업적 이용은 하지 말아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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